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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제로’ 10년 실천해보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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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6호 21면

쓰레기 거절하기

쓰레기 거절하기

쓰레기 거절하기
산드라 크라우트바슐 지음
박종대 옮김
양철북

소비문화 변화 가능성 보여 #결국은 생산 자체를 줄여야

여기 30년 묵은 세탁기와 3년 된 세탁기가 있다. 어느 쪽 세탁기가 더 오래갈까. 오스트리아의 한 사회 활동가에 의하면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 전자는 모든 부품이 스테인리스인 데다 공구만 있으면 나사와 부품을 교체 가능하지만, 후자는 거의 모든 부품이 플라스틱이며 전체를 용접해 놓아 고장이 나도 분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기술이 발전한 지금 더 허접한 물건을 만들게 됐을까. 가전 기업이 지속적인 판매를 위해 제품 수명을 짧아지게 한다는 ‘의도적 노후화’는 이제 상식이 됐다. 실제로 몇 년 쓴 전자제품이 고장 나 수리를 신청하면 ‘부품이 단종됐다’거나 ‘수리비가 더 드니 새로 사는 게 낫다’는 권유를 매뉴얼처럼 듣곤 한다.

하긴, 굳이 고장이 안 나더라도 스마트폰은 2년 약정이 끝날 때마다 최신 기종으로 갈아타는 게 습관이 됐다. 어디 기계뿐인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대량 장만하는 싸구려 새 옷들이 다음 해엔 고스란히 쓰레기가 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잘 돌게 하는 소비문화에 푹 젖어버린 우리는 어느덧 절약이 아닌 낭비를 미덕으로 삼게 됐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겁도 난다. 이 많은 쓰레기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지구를 오염시키지 않고 사라질 수 있을까. 코로나19로 플라스틱 쓰레기가 폭증하고 있다는 뉴스에 잠시 위협도 느낀다. 하지만 이내 ‘나 혼자 걱정해봐야 소용없지 않냐’며 슬그머니 걱정을 내려놓고 만다.

수거한 페트병이 모두 재활용되지는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재활용 비율은 16%에 불과하다. [사진 양철북]

수거한 페트병이 모두 재활용되지는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재활용 비율은 16%에 불과하다. [사진 양철북]

『쓰레기 거절하기』에 따르면 꼭 소용없지만은 않다. 2009년 오스트리아에서 ‘플라스틱 없이 살아보겠다’고 선언한 산드라 가족이 경험한 지난 10여년의 기록은, ‘나 혼자 비닐봉지를 안 쓰고 고기를 안 먹는다고 지구에 무슨 도움이 되냐’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준다.

아이 셋을 둔 평범한 물리치료사였던 산드라는 환경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고 분노를 느껴 ‘플라스틱 제로’ 실험을 하기로 했고, 개인 블로그에 가족의 경험을 포스팅하며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이 가족에게 공감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개인의 ‘실험’은 어느덧 주변인들을 포섭한 ‘운동’으로 확장되어 갔다.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웃집과의 차량 공유부터 시작해 대형 마트 쓰레기장에서 쓸만한 식재료를 골라내는 ‘덤스터 다이빙’ 등 전례 없는 활동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켜야 했다. 그 결과 산드라는 녹색당 의원이 되어 정치적 영향력까지 갖게 됐고, 오스트리아에는 포장 없이 파는 식료품점, 입던 옷을 교환하는 공짜가게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산화탄소는 물건의 생산 시점에 이미 대부분 발생되기에 덜 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환경을 지키려면 먼저 덜 만들어야 한다. 현대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정치경제 시스템이 변화하지 않고는 요원한 일이다. 산드라가 개인적 실천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해결을 도모하게 된 것도 그래서다.

모든 소비를 최소화하는 산드라 가족의 삶이 일견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산드라도 ‘어차피 낭비 시스템으로 돈을 버는 기업이 있다면 정치가 마음대로 규칙을 바꿀 수 없다. 결국 세상을 지배하는 건 돈’이라는 비아냥을 숱하게 들었다. 하지만 10년간 몸소 ‘플라스틱 제로’의 확장성을 확인한 그는 무분별한 소비문화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새로운 경제시스템이 정착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고 보니 요즘 기업들이 제품경제에서 구독경제로 비즈니스 모델을 바꿔 가는 것에 그런 영향도 있을 것 같다. 이제 거대 시스템에 끌려다니던 소비자들이 세상을 바꿀 때가 온 것이다. 내 작은 행동의 영향력을 믿는 것이 곧 환경보호의 시작인 이유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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