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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 트럼프판 '정치 사법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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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호 면

2000년 말 미국 공화당 조지 부시 후보와 민주당 앨 고어 후보의 대통령 선거 결과는 초박빙이었습니다. 최대 관심 지역은 플로리다주(州). 11월 26일 플로리다주 국무장관은 부시 후보가 557표 차로 승리했다는 개표결과를 발표합니다. 고어 후보 측은 즉각 수작업 개표를 전면적으로 실시해달라는 소송을 냅니다. 플로리다주 대법원은 4대3으로 모든 카운티에서 재개표를 해야 한다고 판결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연방 대법관으로 지명한 에이미 배럿. 중앙포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연방 대법관으로 지명한 에이미 배럿. 중앙포토

부시 측이 가만히 있을 리 없죠. 연방 대법원에 상소합니다. 연방 대법원은 플로리다 대법원의 판결을 취소하고 5대 4로 재개표를 하면 안 된다고 결정합니다. 다수의견은, 카운티마다 재개표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재개표를 명령한 것은 평등 보호의 관점에서 수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시의 승리를 연방 대법원이 승인한 순간이었죠. 고어는 전국 총득표 수에서는 이겼지만, 플로리다주에서 지면서 전체 선거인단 수에서 밀렸습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당시 보수 대법관 5명은 헌법상의 투표권리를 옹호한 진보적 결론을 지지했다. 반면 진보 대법관 4명은 플로리다주 최고법원의 의견을 존중한, 곧 사법 자제를 옹호하는 보수적 결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고 설명했습니다. 평소 사법 소극주의를 주장하며 연방보다 주의 권한을 강조하는 보수 이념을 주창하던 대법관들이 주의 자율 판단에 맡겨두어야 할 상황에 개입했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문제에 사법부가 개입한 것이 적절치 않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묘한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난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한 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바로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베럿 판사를 후임으로 지명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치료를 받은 뒤 백악관에 복귀해서는 주요 쟁점이었던 ‘경기부양’ 안에 대한 논의를 중단하고 배럿 판사 인준 작업에 집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민주당은 대선 뒤 당선인이 후임을 임명해야 한다고 반발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일 코로나19로 입원한 지 72시간 만에 퇴원해 백악관으로 돌아와 마스크를 벗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복귀 이후 트위터에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영상 메시지를 올렸다. 로이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일 코로나19로 입원한 지 72시간 만에 퇴원해 백악관으로 돌아와 마스크를 벗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복귀 이후 트위터에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영상 메시지를 올렸다. 로이터

긴즈버그 생전에 보수 5, 진보 4였던 대법원 구조를 보수 6, 진보 3으로 바꾸려 하는 건 대선 결과에 대한 대비이겠죠. 트럼프 측은 연일 우편투표의 조작 가능성을 주장했습니다. 최근에는 트럼프가 코로나19에 감염되면서 두 고령 후보의 건강 상태에 대한 관심도 커졌습니다. 만에 하나 대통령 선거 이전이나 취임 이전에 후보나 당선인의 유고 사태가 발생하면 미국은 혼란에 빠질 겁니다. 결국 최종 결정권은 연방 대법원으로 향하게 될 겁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수 대법관의 수를 늘리려는 목적은 이런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자는 것이겠죠. 정치의 사법화를 유도하고 악용하려는 트럼프를 보면서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문을 갖습니다.

정치의 사법화가 위험한 이유는 뜻하지 않은 우연이나 사건 때문에 사회의 물줄기가 바뀌기 때문이지요. 입법ㆍ행정부가 신뢰받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의 사법화가 심화합니다. 정치 영역이 사회의 대립과 혼란을 해소하지 못하고 모두 법정으로 달려간다면 이 또한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 될 겁니다. 이번 미국 대선은 가뜩이나 정치의 사법화가 심해지는 한국 사회에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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