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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마음 아프다”더니 이틀 만에 종전선언 또 꺼낸 대통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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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문재인 대통령이 8일 “종전선언이야말로 한반도 평화의 시작”이라며 또다시 종전선언을 언급했다. 지난달 23일 유엔총회 연설 이후 보름 만에 동어반복에 나선 것이다. 그 연설 방송 4~5시간 전 북한이 우리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47)씨를 사살하고 불까지 질렀는데도 문 대통령 측은 “녹화가 된 내용”이라며 방송을 강행했다. 이어 숨진 공무원을 ‘월북자’라고 낙인 찍어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급기야 숨진 공무원의 고교생 아들이 “아버지는 월북할 사람이 아니다. 이 고통의 주인공이 대통령님 자녀나 손자라도 지금처럼 하실 수 있느냐”는  서한을 보내자 문 대통령은 그제 “나도 마음이 아프다. 조사 결과를 지켜보자”란 답신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 답신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문 대통령은 또다시 종전선언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비핵화는 실종된 지 오래고 우리 국민이 총살당하고 불태워져도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종전선언과 가짜 평화밖에 없다”는 유승민 전 의원의 메시지가 지나치게 들리지 않을 정도다.

시점 부적절하고, 실현성 없는 얘기 왜 매달리나 #공허한 외침 대신 북한 만행 의혹부터 규명해야

평화를 바라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다. 북한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핵물질 농축을 계속하며 20∼60개로 추산되는 핵무기 숫자 늘리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섣부르게 종전선언을 한다면 북한의 핵무장을 억제할 유일한 버팀목인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동력을 잃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방위의 핵심 축인 유엔사와 주한미군도 “전쟁 위험이 사라졌는데 존재할 이유가 뭔가”란 좌파 세력의 맹공에 직면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고무된 북한은 핵무장 강도를 더욱 높이면서 대한민국을 맘대로 좌지우지하려 들 것이다. 말만 그럴싸한 종전선언의 종착점은 우리 안보의 궤멸과 북한의 ‘핵보유국’ 등극일 뿐이다.

문 대통령은 1년반가량 남은 임기 안에 종전선언을 업적으로 남기고 싶은 조바심이 클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표류 중인 우리 공무원을 잔혹하게 살해해 국민의 공분이 하늘을 찌르는 상황이다.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김정은의 ‘유감 표명’ 한마디로 없었던 일인양 묻어버리고 종전선언을 밀어붙인다면 공감할 국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종전선언의 파트너인 북한과 미국의 반응이 냉랭한 현실도 돌아봐야 한다.

지금 문 대통령이 할 일은 따로 있다. 북한의 우리 국민 피살 만행을 엄중히 규탄하고 관련 의혹을 투명하게 밝혀 상처 입은 유족과 국민의 마음을 달래고, 북한이 다시는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 못하게 단호한 결의를 보여줘야 한다. 이와 함께 한반도에서 평화가 이뤄지는 조건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뿐임을 분명히 하고, 그 전제 위에서 북한을 끈질기게 설득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평화에 왕도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