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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식증, 언니의 죽음..개인의 고통 넘어선 노벨문학상 시인

중앙일보

입력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미국의 시인 루이즈 글릭. [EPA 연합]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미국의 시인 루이즈 글릭. [EPA 연합]

 “노벨상만 남겨뒀던 시인.” 2020년 노벨문학상에 선정된 루이즈 글릭(77)에 대한 윤준 배재대 영문과 교수의 평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8일(현지시간) 글릭을 수상자로 발표했다. 1901년 이후 16번째 여성 수상자이며, 여성 시인으로는 1996년 비스와바 심보르스카(폴란드) 이후 처음이다.

미국 서정시인 루이즈 글릭 #"개인의 이야기를 보편적 가치로" #노벨문학상 역대 16번째 여성 수상자 #'와일드 아이리스'등 시집 12권

뉴욕 태생으로 현재 예일대 영문학 교수인 글릭은 1994년 퓰리처상, 2014년 내셔널 북 어워드를 받았다. 시집 12권과 시에 대한 에세이 등을 냈으며 미국 현대문학에서 중요한 시인 중 하나로 꼽힌다. 윤준 교수는 “국내에는 번역된 작품이 없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많은 상을 받았던 작가”라고 소개했다.

글릭의 시는 개인적 고통에서 출발해 인간의 보편적 감정으로 나아간다. 데뷔작인『맏이(Firstborn)』(1968) 등 초기 작품에는 특히 과거의 기억이 반영됐다. 그는 10대 시절 거식증을 겪었고,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언니의 존재에 대해 알았다. 한 에세이에서 글릭은 “언니의 죽음은 내 경험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부재는 내 경험이었다”며 “그녀의 죽음이 나를 태어나게 했다”고 회고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했으며, 7년 동안 정신 상담 치료를 받아야 했던 경험도 했다. 노벨 위원회의 안데르 올슨 위원장은 홈페이지에 글릭을 소개하며 “고통스러운 가족 관계에 대한 잔혹하고 직설적인 이미지를 그의 시에서 만나게 된다”고 소개했다.

2016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내셔널 휴머니티스 메달을 받고 있는 루이즈 글릭(왼쪽). [로이터=연합뉴스]

2016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내셔널 휴머니티스 메달을 받고 있는 루이즈 글릭(왼쪽). [로이터=연합뉴스]

글릭에 대한 높은 평가의 근거에는 개인의 경험에만 머무르지 않는 보편성이 있다. 한림원이 밝힌 선정 이유는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갖춘 시적 표현으로 개인의 존재를 보편적으로 나타냈다”였다. 올슨 위원장은 “글릭은 신화와 고전적 모티브에서 영감을 얻으면서 개인의 이야기를 동시에 보편적인 가치로 변용시켰다”고 평가했다. 특히 그의 작품 중 ‘아베르노(Averno)’를 예로 들어 하데스에 붙잡힌 페르세포네의 신화를 몽환적으로 해석했다고 호평했다. 양균원 대진대 교수 또한 “초기 시에서는 자전적 목소리를 냈지만 이후에는 순수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일상어, 간결한 이미지, 거리를 유지하는 정서적 어조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글릭은 미국 시의 한 부류인 ‘고백파(confessional poet)’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정은귀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는 “미국의 두 전통인 고백시와 언어시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시인”이라며 “그의 시 세계가 우리 삶의 보편적 문제, 상실, 아픔을 자연 속에 투영하고 있기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것”이라고 봤다.

글릭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시집 『와일드 아이리스(The Wild Iris』(1992)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꽃을 비롯한 다중의 존재가 화자로 등장해 생명과 그 순환에 대해 노래하는 연작시가 실려있다.
“내 고통의 끝에/문이 있어요./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당신이 죽음이라 부르는 것을 나는 기억해요.”(‘야생 아이리스 1’, 번역 양균원)
꽃이 건네는 말로 시작한 연작시는 구근이 묻히는 장면으로 끝난다.
“당신의 두 손이 느껴져요./그 광휘를 풀어 놓으려고/나를 묻는 손길이.”(‘흰 백합’, 번역 양균원)
양균원 교수는 “가장 개인적인 고통의 순간을 표현하면서 그것이 포괄적인 인간의 문제로 확장하는 언어가 된다. 종래의 서정시에 새 기능성을 제시한다”고 풀이했다.

최근 몇 년간 잡음이 일었던 한림원은 이처럼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지적인 시인을 올해 수상자로 선택했다. 노벨문학상은 2017년 말 스웨덴 한림원 종신위원의 남편이 미투(Me too)로 고발당한 것을 비롯한 연이은 잡음으로 2018년 수상자 선정 자체를 취소했다. 미투뿐 아니라 명단 사전 유출 의혹, 이에 대한 미온적 대처에 항의하는 종신위원 6인의 사퇴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2년 치 수상자를 발표한 지난해에는 수상자 페터 한트케가 인종 학살자인 유고의 슬로보딘 밀로셰비치를 옹호한 전력으로 논란이 됐다. 이처럼 스캔들을 겪은 후의 노벨 문학상은 흑인 인권, 여성 문제 등에 관해 발언해온 작가들의 수상이 예견됐기도 했지만, 단정한 언어로 보편적 정신을 노래한 시인이 선정된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스웨덴 한림원이 최근 몇 년간 시달려온 스캔들에서 벗어나는 데 글릭을 선정한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글릭의 시가 코로나19 사태를 맞은 인류를 위로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영국의 소설가 매트 해이그는 글릭의 시 ‘스노우드롭스(Snowdrops)’를 자신의 트위터에 인용하며 “회복에 관한 최고의 시. 마지막 구절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시상식은 본래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지만 올해는 코로나19의 여파로 각국에서 따로 진행한 뒤 TV로 중계한다. 상금은 100만 스웨덴크로나(약 13억원)이다.

김호정ㆍ유성운ㆍ나원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루이즈 글릭의 시 전문

 흰 백합(The White Lilies)

조용하세요, 연인이여. 얼마나 숱한 여름을 내가
살아서 되돌아왔는지, 그게 내겐 중요하지 않아요.
올해 한 차례 여름으로 우리는 영원에 들어섰어요.
당신의 두 손이 느껴져요.
그 광휘를 풀어 놓으려고
나를 묻는 손길이.

Hush, beloved. It doesn’t matter to me
how many summers I live to return:
this one summer we have entered eternity.
I felt your two hands
bury me to release its splendor. (The Wild Iris 63)

(번역=양균원 대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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