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권 한가운데 규제개혁을 두겠다” 취임 20여일만에 드러나는 스가식 개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원격 진료를 디지털 시대에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지난 7일 열린 규제개혁추진회의에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는 원격진료 사업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의료계는 물론 후생노동성 관료 등 '기득권'의 저항에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던 사업이다. 이를 대표적 규제개혁 사안으로 삼아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현장 진료가 어렵게 되자 일본 정부는 지난 4월 처음으로 원격 진료를 한시적으로 승인했다. 이를 아예 상시화하겠다는 게 스가 내각의 구상이다. 스가 총리는 후생노동성을 포함한 각 정부부처에도 “스스로 규제개혁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다그쳤다.

규제 개혁을 취임 일성으로 내세운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AP=연합뉴스]

규제 개혁을 취임 일성으로 내세운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AP=연합뉴스]

취임한 지 셋째주가 지나며 ‘스가 식 개혁’ 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스가 총리는 취임 직후 “규제 개혁을 정권의 한가운데 두겠다”고 선언했다. 전날 직접 주재한 규제개혁추진회의가 주요 무대다. 이어 주제별로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속도감 있게 중점 과제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장애물 치워 성장 동력 확보  

‘아베 계승’을 내세우고 있는 스가 정권에 규제 개혁은 '아픈 손가락'이다. 전임 아베 총리가 쏜 '세 개의 화살' 중 첫번째 금융완화, 두번째 재정확대는 어느 정도 과녁에 근접했고 효과도 봤다. 하지만 마지막 화살인 구조개혁은 과녁을 비켜 나갔다. 이 구조개혁의 핵심은 각종 규제를 걷어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스가가 규제 개혁을 앞세운 건 이 구조개혁의 활시위를 다시 당기겠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언급된 핵심 과제는 디지털화, 성장잠재력 확대를 위한 중소기업과 지방은행의 재편, 최저임금 인상과 휴대전화 요금 인하 등을 통한 소비 확충 등이다.

지난 7월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지난 7월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디지털화 드라이브는 코로나19를 겪으며 얻은 뼈아픈 교훈이 바탕에 있다. 여전히 팩스로 대부분의 문서를 주고받는 공무원들은 감염자나 사망자 취합조차 제때 할 수 없었다. 재난 지원금 지원 과정에서도 큰 혼란이 벌어졌다. 재택근무 권고에도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해 출근할 수밖에 없다”는 회사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스가 총리는 취임 직후 디지털청 설립을 띄우고, 연내에 설립을 위한 기본 계획을 마무리짓는다. 내년 초에는 국회에 관련 법도 내놓겠다고 밝힌 상태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행정개혁 담당상도 취임 일성으로 모든 부처에 도장 사용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중소기업 통합·재편, 지방은행 구조조정도 스가 총리가 밀어붙이는 경제 개혁의 한 축이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에는 소규모 사업자를 포함한 중소기업이 358만 개로, 전체의 99.7%를 차지한다. 스가 총리는 취임 전부터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중소기업 효율화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해왔다. 장기 저금리에 허약해진 지방 금융기관도 구조조정해 실물을 지원할 토대를 갖추겠다는 구상이다.

통신요금 인하, 최저임금 인상은 민생 대책이면서 소비 잠재력을 끌어올리려는 포석이다. 스가 총리는 현재 전국 평균 902엔(약 9800원)인 일본의 최저임금을 1000엔(약 1만 800원)까지 빠르게 올려 경기 활성화를 꾀하겠다고 밝혔다.

보안법 발효 이후 홍콩을 떠나려는 해외기업을 도쿄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세금 감면과 체류 자격 등 규제 완화가 핵심이다. 스가 총리는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인터뷰에서 “해외로부터 금융 인재를 끌어들이면 시장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다”며 이같은 계획을 밝혔다.

일본 정부는 특히 홍콩과 싱가포르보다 두 배 높은 소득세율을 금융허브 전략의 걸림돌이라고 보고 있다. 일본은 과세소득 1000만엔(약 1억 900만원) 이상의 고소득자에게 33%의 소득세를 부과하는 데 이는 홍콩의 17%와 싱가포르의 15%에 비해 크게 높은 수준이다.

중요한 건 '스피드'

스가 내각에서 눈에 띄는 건 무엇보다 속도다. “나쁜 전례 타파”를 앞세운 스가 총리는 정권 발족 1주일만인 지난달 23일 ‘디지털 개혁 관계장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엔 전 부처 장관이 모두 참석해 스가 총리가 대표적인 상품으로 내놓은 ‘디지털청 신설’과 관련한 검토에 들어갔다. 스가 총리는 “지금까지 없었던 속도로 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다”면서 “모든 장관이 개혁에 전력으로 협조해주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이어 관광진흥, 농산품 수출확대를 위한 관계장관회의를 잇따라 열었다. 자문회의 역시 정권 발족 후 3주일도 안 된 지난 6일 개최했다.

일본 정부는 코로나19 확산 후 재택근무를 장려했지만 종이 서류에 일일이 도장을 찍어 결재하는 문화가 재택근무의 장벽이 됐다. [인터넷 캡쳐]

일본 정부는 코로나19 확산 후 재택근무를 장려했지만 종이 서류에 일일이 도장을 찍어 결재하는 문화가 재택근무의 장벽이 됐다. [인터넷 캡쳐]

고노 행정개혁 담당상은 취임하자마자 전 부처에 “도장 폐지 개획을 제출하라”고 재촉했다. 경제산업성과 국토교통성은 이용 건수가 많은 820종의 서류 가운데 약 96%에 해당하는 785종에 대해 직인을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고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 단계는 종이서류와 팩스를 없애겠다”며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규제개혁, 총리가 직접 챙긴다

스가 총리는 취임 후 열흘 동안 민간인 전문가 14명과 직접 면담을 가졌다. 많을 때는 하루 6명의 전문가를 만나기도 했다. 관광정책, 중소기업 경영, 디지털 정책, 의료 등 분야는 전방위고 학자, 기업인, 언론인 등 출신도 다양하다. 공무원 조직으로부터 올라오는 정보에만 편향되지 않겠다는 의도다. 전임 아베 총리가 관저 중심의 독단적 결정으로 비판받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실제 불임치료 보험적용과 관련해 산부인과 전문의와 면담을 한 이틀 뒤 저출산 정책을 담당하는 사카모토 데쓰시(坂本哲史) 일억총활약 담당장관을 관저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리곤 "최대한 빨리 불임치료에 보험 적용을 하겠다"고 밝혔다. 관저 안팎에선 “만기친람형 관방장관 출신답게 총리가 직접 챙긴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김명중 닛세이기초연구소 주임연구원은 “아베노믹스가 대기업과 부유층 중심의 정책이었던 반면 스가노믹스는 서민에게도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오는 정책을 전개해 민심을 사려하고 있다”면서 “디지털화를 통해 도시 집중화를 분산시켜 도쿄와의 격차를 줄인다면 아베 정권과 차별된 정책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개혁=‘족(族)’과의 싸움 

관건은 규제개혁에 반드시 따라오는 기득권과 싸움에서 버텨낼 수 있느냐다. 당장 원격 진료, 불임치료비 보험 적용 등과 관련해선 일본의사회 등이 저항하고 있다. 의료 설비가 잘 되어있는 병원으로 환자가 집중될 경우 일반 개업의는 경영이 곤란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대표적인 도장 산업지인 야마나시(山梨)현의 현의회는 스가 정부의 ‘탈(脫) 도장’에 반대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이들은 “도장문화는 일본의 상징”이라면서 “도장이 마치 장해 요인인 것처럼 도장산업이 부당한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에선 이미 ‘디지털 수속 개정법’이 도장업계의 반발 등에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전례가 있다.

특히 자민당에는 각 업계와 연관된 이른바 ‘족(族)’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당내 의견 조정도 쉽지 않은 문제다. 자민당의 한 간부는 “지금까지도 개혁을 해왔는데, 더 개혁한다면 큰일이라는 경계감이 있다”라면서 은근히 반감을 드러냈다.

휴대전화 요금 인하 정책은 민간기업의 요금 정책에 정부가 개입한다는 논란도 일으키고 있다. 공기업 성격이 강한 NTT가 먼저 이동통신 회사인 NTT 도코모를 자회사로 흡수하면서 요금 인하에 앞장서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일각에선 “반드시 대가가 있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스가의 개혁에 대해 일부에선 “사회보장제도 개혁 등 근본적인 재정정책에 대한 구체적 대책은 보이지 않고, 최저임금 인상, 의료보험 확대 같은 인기를 끌 수 있는 정책이 많다”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스가 총리는 집권 초 지지율을 동력 개혁을 밀어붙이겠다는 심산이다. 통신비 인하 등에는 무파벌 총리의 한계를 국민 지지로 돌파해보겠다는 현실적인 전략도 깔려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지난달 28일 국내 주요기업 사장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앙케이트에서 89.3%가 “규제 완화를 확대해야 한다”면서 스가의 규제 완화 방침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변화에 둔감하고 기득권이 강한 일본 사회의 특성상 이런 스가 식 규제개혁이 '과녁'을 맞힐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는 게 한·일 전문가들의 얘기다. 하지만 일단 취임 초 추진력과 속도는 예상을 웃돈다는 평가가 나온다. 새로운 규제를 양산하고 있는 한국 정치권과도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규제개혁위원회에 따르면 5월말 출범한 21대 국회에서 나온 규제법안은 하루 평균 4건이 넘는다.

도쿄=윤설영 특파원, 서울=이영희 기자 snow0@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