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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어떤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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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어떤 나라가 있다. 야당이 있기는 한데 그쪽 의원들은 국정감사에서 원하는 증인을 부를 수 없다. 집권당이 반대하면 끝이다. 그 당은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모두 차지했고,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수를 갖고 있어 언제든 자기들끼리 모여 법을 만들거나 고칠 수 있다. 이미 여러 번 위력을 드러냈다. 그들은 야당인지 의심스러운 곳 소속이거나 당적 없는 의원들과 모종의 거래를 하면 헌법도 바꿀 수 있다. 당장은 필요하지 않아서인지, 불편한 헌법 조항은 무시해도 그만이기 때문인지 아직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권력 견제 기관들 모두 기능 잃고 #시민이 광장 밖으로 쫓겨난 나라 #이런 곳을 민주국가라 할 수 있나

그 나라에서 권력을 견제하도록 설계된 기구들은 제 기능을 잃었다. 검찰 총수에겐 독립적 검찰 운영 권한과 법적 임기가 보장돼 있다. 그런데 집권 세력이 인사권을 이용해 총수 주변 사람들을 변방으로 몰아내고 그들이 있던 자리를 자신들 편이라고 믿는 검사들로 채웠다. 총수가 허수아비가 됐는데, 그나마도 못 쫓아내 안달이다. 상전인 장관이 “총장이랍시고”라며 공개적인 자리에서 무시하고 면박을 준다. 정부 사무를 감독하는 감사원의 총책임자도 정권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은 죄 때문에 검찰 총수와 비슷한 신세가 됐다.

헌법과 법률을 근거로 집권 세력의 전횡과 부패를 막을 힘을 가진 대법원·헌법재판소도 심히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다. 대통령과 여당에 우호적인 인사들이 하나둘 늘더니 어느새 그들이 판결과 결정을 이끄는 다수를 이뤘다. 일반 법원에서도 집권층과 관련된 재판은 수상하게 진행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대통령 측근이 특별검사에 의해 선거 여론 조작 혐의로 기소된 사건은 수년째 법원에서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특권층이 보호된다. 간혹 법원이 정권에 불리한 판결을 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홍위병’ 같은 이들이 판사를 매국노 취급하며 댓글 테러와 신상털이를 가한다. 이들을 말릴 힘을 가진 이 중 그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 오히려 즐기는 듯하다.

그 나라에서 권력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게 돼 있는 언론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영방송 경영진은 친여 인사 일색이고, 민간방송 채널들은 정부가 승인을 취소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몇몇 신문이 비판의 명맥을 지키고 있지만 여론 형성에는 역부족이다. 보도물을 유통하는 ‘포털’이라는 존재가 공론의 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은 포털이 마음에 안 들면 책임자에게 “들어오라”고 명령한다. 포털은 쇼핑·금융·운수(택시) 사업까지 벌이고, 심지어 골프공도 만들어 판다. ‘문어발 경영’ 말라며 기업을 옥죄던 집권 세력은 포털엔 더할 나위 없이 너그럽다. 꼬리 치는 애완견 쓰다듬는 주인의 모습이다.

드세기로 소문났던 그 나라 시민단체 간부들은 꿀 먹다가 위아래 입술이 들러붙은 사람처럼 조용하다. 핵심 인사들은 죄다 감투를 썼고, 단체에는 지원금이 후하게 하사됐다. 꿀이 따로 없다. 종종 지식인들이 ‘시국선언’을 하는데, 정권은 자기 편을 앞세운 관제 선언으로 물타기한다. 거기에도 꿀단지가 쓰인다.

그 나라 국민은 이상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화가 치밀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주변 사람에게 기사 또는 유튜브 영상을 전송하며 공감을 기대하거나 술자리에서 한탄하는 게 고작이다. 큰맘 먹고 광장에 나가 “나라가 너희들 거냐”고 외치려 하면 경찰이 광장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 헌법에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가 국민의 기본권이라고 적혀 있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70대 노(老)가수가 호기롭게 던진 현실 비판 몇 마디에 대리만족을 하며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다. 정부는 감염병 비상시국이라 광장을 막았다고 주장한다. 그 나라는 국가 안보, 사회질서 확립, 성공적 올림픽 개최 등을 이유로 위정자가 때때로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는데, 그 비상시국론이 부활했다. 지금 이 나라를 민주국가로 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