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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조성길 대사 망명, 최소한의 사실 공개가 바람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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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근 2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조성길 전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대리가 지난해 7월 한국에 들어와 조용히 지내 온 것으로 밝혀졌다. 독재의 사슬에서 탈출한 북한 주민이, 그것도 풍부한 대북 정보를 갖춘 북한의 고위 외교관이 안전하게 탈출해 정착했다는 건 다행스러운 소식이다.

북한 억류 중인 딸의 안전을 고려하되 #이왕 알려진 만큼 망명 경위 등 밝혀야

조 전 대사대리는 부친과 장인 모두 북한 내 최고위급 인사로 이탈리아에서 사치품 조달 등을 맡아 왔다고 한다. 게다가 그의 남한행은 김정은 정권 출범 후 처음 있는 대사급 인사의 망명이다. 온갖 혜택을 누려 온 특권층마저 탈출했다는 사실은 김정은 체제하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새삼 일깨워 준다. 그렇기에 조 전 대사대리의 결행이 북한 주민들 사이에 알려지면 김정은 체제에 대한 회의가 확산될 수밖에 없다. 특히 내년 초로 잡힌 8차 노동당대회를 앞두고 김정은 정권이 ‘80일 전투’를 시작하는 등 내부 결속을 다지는 상황이라 그 타격이 증폭될 공산도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조 전 대사대리의 딸이 이탈리아에서 북한으로 끌려갔다는 대목이다. 그가 대놓고 김정은 체제를 비난할 경우 딸이 어떤 화를 입을지 모른다. 망명 소식이 퍼지면 그를 노리는 북한의 테러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조 전 대사대리가 공개적인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대북 관련 연구소에서 조용히 일한다는 점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이런 우려에 대해 여야 모두 공감하는 모습을 보인다. 북한 대사관 공사 출신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나서 “북한에 남겨진 그의 딸에게 불리할 수 있다”며 보도 자제를 요청했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이 당 최고위원회의를 열고도 이번 망명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것 역시 조 전 대사대리를 배려한 처사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 전 대사대리의 딸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을 범위에서 그의 이탈리아 내에서의 공작 활동 및 망명 경위 등 최소한의 사실을 공개하는 게 바람직하다. 망명 사실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면 모르겠지만 그의 망명과 관련된 중요한 뼈대는 이미 알려졌다. 그가 2018년 11월 근무지인 로마에서 잠적한 이후 제3국 공관을 통해 망명을 신청했으며 지난해 7월까지는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체류했다는 사실 모두 보도된 상황이다. 이런 터라 망명 사실 자체를 숨겨봤자 남북 관계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거란 얘기다.

대북 제재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정권이 얼마나 많은 사치품을 사들여 왔는지, 어떤 불법적인 행위를 저질렀는지 등을 파악해 적절한 범위에서 알리는 게 좋다. 굳이 조 전 대사대리의 입을 빌리거나 그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정부는 상식적이고 예측 가능한 사실마저 덮음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부르지 말아야 한다. 잘못 처신하다간 북한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는 비판을 자초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