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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시각각

월세의 서러움을 아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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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월세살이를 두 번 해봤다. 일본에서였다. 첫 번째는 연수 시절이었고, 두 번째는 특파원 때였다. 한국에서는 겪지 못한 묘한 설움이 있었다. 월세는 본질적으로 임대인과 임차인을 완벽한 갑을 관계로 만든다. 말 그대로 월세는 월 단위의 단기계약이기 때문이다.

내 집 마련 사다리 걷어차고 #임대차 3법으로 전셋값 급등 #정책 실패로 국민 고통 가중

이런 이유로 일본에서 세입자는 집주인 앞에서 몸을 낮춰야 한다. 집주인은 세입자의 신상을 꼼꼼히 파악한다. 어린아이가 있는지, 몇 살인지, 세입자의 직업까지 살핀다. 이건 기본이고 거주비와 관계없는 돈을 집주인에게 ‘바쳐야’ 한다. 먼저 사례금이다. ‘집을 빌려줘서 감사하다’는 뜻으로 통상 한 달치 월세를 내놓는다. 이 사례금을 낼 때 마치 뇌물 바치는 기분이었다. 둘째는 손해배상에 대비한 보증금이다. 계약이 끝날 때 집 상태를 점검해 손상분을 공제한다. 못 구멍, 바닥 흠집, 싱크대의 심한 얼룩이 모두 비용이다. 이건 약과다. 독일에서는 세입자가 자기소개서까지 써야 한다고 한다. 정말 고달픈 일이다.

이런 월세의 공포를 떠올린 건 문재인 정부가 밀어붙인 임대차 3법이다. 집권 여당 인사들은 “전세가 월세로 전환되는 게 나쁜 현상이 아니다. 국민 누구나 월세 사는 세상이 다가올 것”이라고 했다. 전세 계약을 2+2년으로 연장할 수 있게 되면서 앞으로 2년 후에는 대혼란이 예상되는데도 나온 발언이다. 2년 후가 아니라 당장 집주인·세입자 간 분쟁이 줄을 잇는 게 현실이다.

월세는 무엇보다 생돈이 나간다. 그래서 돈을 모으기 어렵다. 여당 국회의원은 자신도 월세를 산다고 했지만 알고 보니 지역구에 내려갈 때 머무르는 용도였다. 현실의 세계는 어떤가. 예컨대 월소득 500만원의 가계가 쓸 만한 집을 구한다면 보증금 수억원의 반전세로 매달 150만원 정도는 월세로 내야 한다. 생활비를 쓰고 나면 내 집 마련을 위한 저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울 아파트값 평균이 10억원을 돌파했으니 말이다.

월세를 살면 전세를 살 때만큼 깔끔한 새집에 살기 어렵다. 월세는 소비성 지출이기 때문에 큰돈을 지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돈을 많이 내면 대궐 같은 월세에 살 수도 있지만 서민과는 관련이 없는 얘기다. 결국 월세를 아끼려면 변두리로 나갈 수밖에 없다. 월세살이가 계속되면 아이들의 기도 죽게 된다. ‘월세 사는 집’의 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월세는 집에 못 하나 박아도 분쟁이 생길 수 있다. 빈번하게 세입자가 바뀌기 때문이다. 주택시장 전체로 보면 슬럼화가 가속된다. 일본에서 집 보러 다닐 때도 선진국이고 월세가 꽤 비싼데도 주택의 품질이 높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전세의 장점을 폄훼하고 무시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전세는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시대착오적이고 부끄럽다는 말투다. 그러나 전세의 장점에는 눈 감은 소리다. 우선 전세는 저축 기능이 있다. 중산층 자산 증식의 사다리가 된다. 전세가 끝나도 그 돈을 돌려받는다. 기회비용으로 은행 이자만 내면 된다. 집값의 50~70%를 내고 살다가 온전히 돌려받으니 외국인들은 전세제도를 부러워한다. 편리성도 크다. 교육이나 출퇴근 때문에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거주지를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현실이 이런데도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 모든 국민이 강남 살 필요 없다” “전세가 월세로 전환되는 게 나쁜 현상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은 혹세무민이고 현실 부정이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돈은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 예컨대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월세 상한제를 도입하자 공급이 15% 감소했다. 수익 저하가 공급 감소를 불러온 결과다. 임대차 3법 도입의 후폭풍이 본격화하면서 두 달 만에 서울 월세 물량이 전세를 앞질렀다. 서민들은 교외로 밀려 나가야 한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66주 연속 올랐다. 정부의 정책 실패로 국민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