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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차도르로 미소 감춘 기독교 나라 케냐 빈민가 소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허호의 꿈을 찍는 사진관(24)

기도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담긴 벽화와 검은 천의 무슬림 전통의상 ‘차도르’를 입고 그 앞에 선 한 소녀의 모습. 배경과 피사체가 주는 상반된 느낌이 사진의 메시지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사진 허호]

기도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담긴 벽화와 검은 천의 무슬림 전통의상 ‘차도르’를 입고 그 앞에 선 한 소녀의 모습. 배경과 피사체가 주는 상반된 느낌이 사진의 메시지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사진 허호]

지난 2018년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의 키베라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키베라는 아프리카 최대 빈민가 중 하나입니다. 국제어린이양육기구 컴패션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센터에 처음 들어섰을 때, 온몸을 검은 천으로 감싼 무슬림 전통의상 차림의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혜국 현지에 가보면 보통 아이는 어린이센터에 올 때 편안한 옷차림으로 옵니다. 방문한 후원자들과 다양한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무슬림 전통의상을 입고 먼발치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여인이라니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센터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그곳에서 어릴 때부터 양육 받고 이제 졸업을 앞둔 10대 후반의 소녀였습니다.

조심스레 다가가서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온몸을 휘감은 차도르 탓에 나이도 가늠하기 어려웠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차도르 사이로 보이는 순수한 눈빛이 영락없는 10대 소녀였습니다. 혹여나 실례가 될까 싶어 얼굴을 가린 천을 내리고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정중히 물었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었습니다.

검은 차도르 밖으로 내민 무슬림 소녀의 앳되고 순수한 미소. 아이의 환한 얼굴을 보니, 오랜 기간 어떤 편견이나 차별 없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고 자란 것 같아 흐뭇했다.

검은 차도르 밖으로 내민 무슬림 소녀의 앳되고 순수한 미소. 아이의 환한 얼굴을 보니, 오랜 기간 어떤 편견이나 차별 없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고 자란 것 같아 흐뭇했다.

컴패션은 기독교 가치관에 따라 전 세계 가난한 환경에 놓인 어린이를 양육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아마 어린이센터에서 만난 차도르 차림의 소녀 모습이 더 생경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현장에서 종교가 걸림돌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결코 그래서도 안 되지요. 이곳에서 후원받는 어린이는 현지 센터에 등록될 때 몇 가지 기준에 따릅니다. 1일 생계비가 2달러(해당 국가 환율 적용) 미만이거나 부모가 초등학교 이하의 학력을 가진 가정에 사는 어린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어린이, 영양실조나 심각한 질병을 가진 어린이 등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상태에 있는 가정의 어린이가 우선 선발됩니다. 아이와 아이 가족의 종교는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가 후원을 받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센터에서 양육 받는 동안 개종을 권유받지 않습니다.

국제컴패션에 따르면 케냐는 기독교인의 비율이 80% 이상을 차지합니다. 무슬림은 전체 인구의 11% 정도입니다. 10명당 1명꼴이지요. 종교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야기되기도 하는 세상인데, 이 아이가 꽤 오랜 기간 편견이나 차별 없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받고 자란 모습을 보니 흐뭇했습니다. 차도르 안에 숨겨져 있던 아이의 환한 미소를 보면서 종교의 차이가 인간 사이에 전해지는 온기까지 가로막진 못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거대한 사랑 속에서 결국 우리는 하나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수혜국 현지에서 무슬림을 만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닙니다. 2008년 방글라데시를 방문했을 때도 무슬림 모자가 어린이센터에서 함께 도움을 받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태아·영아 생존 후원을 받는 어린아이와 엄마였는데, 그 엄마 역시 검은색 히잡으로 상반신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2008년 방글라데시 어린이센터에서 만난 무슬림 여성과 아이의 모습.

2008년 방글라데시 어린이센터에서 만난 무슬림 여성과 아이의 모습.

방글라데시는 전체 인구의 약 90%가 무슬림입니다. 당시 우리가 방문했던 어린이센터도 무슬림 지역 안에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저도 조심스럽더군요. 그런데 컴패션이 기독교 가치관에 따라 어린이를 양육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부모가 아이를 등록시키고 싶어한다고 하더라고요. 참 놀라웠습니다. 제가 만난 아이의 엄마 역시 호의적인 태도로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사진촬영 요청도 기분 좋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현지 어린이센터의 지속적인 사랑과 헌신이 지역민의 신뢰를 쌓은 덕분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전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다 보면 종종 무슬림 가정 어린이들이 컴패션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해 보면, 아이를 대하는 교사의 마음 밑바탕에 글자 그대로의 컴패션(compassion,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사랑에는 나와 다른 이를 온전히 수용하고 품게 만드는 힘이 있으니까요.

요즘 이례적인 코로나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도 여러 가지 사회적 갈등이 더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지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사건도 계속되는 모습입니다. 위기의 시기를 지나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오래전 찍어 놓은 사진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사진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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