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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혁주의 시선

입을 막고서 살겠다는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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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30년쯤 전에 본 북한의 연구 논문은 이런 문구로 시작했다. 단어 하나하나가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지만, 대략 ‘위대한 령도자 김일성 수령님의 무슨 무슨 교시에 따라 연구하였다’는 투였다. 우리 식 표현으로 ‘강력하게 정책을 뒷받침하는 연구’라고나 할까. 하여튼 논문은 교시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내용이었다.

지역 화폐, 탈원전, 뉴딜 펀드 등 #정책 비판하는 전문가 보고서는 #실종되거나 권력 뭇매 맞는 세상

30년 전 기억을 떠올린 건 요즘 돌아가는 상황 때문이다. 툭 하면 전문가를 윽박지르고, 때론 논문·보고서가 실종되기까지 한다. 익히 알다시피 이재명 경기 지사가 정점을 찍었다. 발단은 지역 화폐의 부작용을 지적한 한국조세재정연구원 보고서다. 열심히 지역 화폐를 퍼뜨린,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긴걸까. 이재명 지사는 연구진에게 “얼빠졌다” “적폐” “철밥통” “엄중 문책” 등등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나름 논리적 공격도 했으나 되레 빈축을 샀다. 조세연이 보고서에서 지역 화폐를 옹호한 연구(지방행정연구원)의 문제점을 지적했음에도 이 지사는 “지방행정연구원이 틀렸다는 근거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대체 보고서를 읽기는 했느냐”는 반문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보고서·논문이 수난받는 일은 문재인 정부 들어 여러 차례 있었다. 지난해 말에는 에너지경제연구원이 정기 간행물 ‘세계원전시장 인사이트’를 홈페이지에 올리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탈원전 정책을 넌지시 비판한 정용훈 KAIST 교수의 분석이 화근이었다. "우리는 1차 운영허가 기간이 끝나면 원전을 폐쇄하겠다는데, 미국처럼 20년 연장하면 수백조 원 이익이 생긴다”는 내용이었다. 하필 머리글이었던 이 보고서가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던가 보다. 지난해 12월 13일 자 ‘세계원전시장 인사이트’ 전체가 제때 온라인에 게재되지 못했다. 두 달 후 몇몇 매체는 "에경연이 비공개를 결정했다”고 운명을 전했다. (어찌 된 일인지 지금은 논란의 간행물이 에경연 사이트에 올라와 있다.) 비슷한 시기, 환경부 산하 환경산업기술원은 "온실가스를 감축하려면 원전 활용이 불가피하다. 이는 세계적인 추세”라는 칼럼을 온라인에 게재했다가 삭제하는 촌극을 빚었다.

최근엔 뉴딜 펀드를 비판한 증권사 투자분석 보고서가 슬며시 사라졌다. 지난달 하나금융투자에서 나온 보고서다. "뉴딜 펀드에 이르기까지 각종 정책에 은행들이 활용되면서 은행 주주들의 피로감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요지였다. 홈페이지에 있던 보고서는 며칠 뒤 종적을 감췄다. 하나금융투자의 내부자는 익명 게시판(블라인드 앱)에 "기재부와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는 글을 올렸다.

야당은 삭제 사건을 국정감사에서 따지겠다고 벼르고 있다. 하나금융투자는 "필자 자신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직접 삭제했다. 외부 압력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연락이 아예 없지는 않았던 듯하다. "여당이 작성 배경 등을 하나금융 측에 문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정말 작성 배경을 물었다면, 북한식으로 표현해 ‘오지랖’이다. 모든 투자 보고서의 배경은 ‘고객 수익률 높이기’다. 투자에 참고해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고객이 외면한다. 증권사 보고서에 대한 심판은 그렇게 고객과 시장의 몫이다. 정치가 끼어들 데가 아니다.

뉴딜 펀드든, 탈원전이든, 지역 화폐든, 원칙이나 추진 방법에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 마땅하다. 이 과정에 필수인 논리적인 분석·지적·비판은 전문가의 몫이다. 두뇌를 모아 국책 연구기관을 만드는 이유다. 조세연 역시 제 할 일을 했다. 그러나 이 지사는 논리보다 감정을 앞세운 듯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대해 범여권인 열린민주당의 주진형 최고위원은 "(조세연이) 그만한 이야기도 못 하면 이거 완전히 사람들 입을 막고서 살겠다는 이야기”라고 했다. 반대 의견에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이 처신하기 참 힘든 세상이다. 입조심하지 않으면 권력으로부터 뭇매를 맞을 판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동병상련이 도처에 널렸다는 사실이랄까. 추석 연휴 기간에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칼을 빼 들었다. 아들의 휴가 의혹 등을 검찰이 무혐의 처리한 직후였다. 자신의 거짓말들이 들통난 데 대해서는 한마디도 않고, 언론 등에 "책임져야 할 것” "사과하라. 아니면 후속 조치하겠다”고 발언 수위를 높였다. 이 역시 뭔가 입막음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발칙한(?) 상상이 든다. 추 장관이 과거 정치 자금을 엉뚱한 데 썼다는 의심을 받는 판이어서다. 왠지 한숨이 나온다. 1970~80년대 운동권이었던 현 집권 세력이 당시 군사 정권의 행태를 묘하게 닮아가는 것만 같다. 허탈하기만 한 2020년 가을 대한민국의 풍경이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