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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돈의 퍼스펙티브

막말·궤변의 양극화 정치…제3지대 조성 절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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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분열된 한국 사회, 그 종착역은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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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백서』와 『조국 흑서』가 동시에 출간되어 판매 부수 경쟁을 벌였는데, 『흑서』가 승리했다. 『흑서』가 진보 필자들에 의한 진보 인사 비평 서적이란 점에서 보다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흑서』를 구매한 사람들은 주로 문재인 정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기에,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실체적 진실보다 진영논리가 중요한 우리의 현실을 다시 보여준 셈이다.

조국 사태 등을 보면 실체적 진실보다 진영 논리가 득세해 #대립·분열 계속되는 정치 양극화,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어 #당파 정치에서 자유로운 인사들이 국민통합 노력 시작하고 #대립하는 양쪽 포화 받아 내고 중화시킬 제3지대 있어야

신문과 방송을 통해 생산되는 뉴스나 논평도 이런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론 매체가 실체적 진실을 추구하고 정론을 편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말았다. 매체가 자신들의 소비자층을 의식하고 콘텐트를 생산하는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뉴스 매체가 생산한 콘텐트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지는데, 파급력이 큰 콘텐트는 진영 논리에 근거한 파당적인 것들이다. 책이든 신문·방송이든 할 것 없이 모두 자신들이 타깃으로 삼은 소비자층을 의식하고 콘텐트를 만들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과연 하나의 국가에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미 대선서 누가 승리하든 극단 대립 계속

대선을 한 달 앞둔 미국도 사정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와 조 바이든 간의 선거는 해리 트루먼과 토머스 듀이가 경쟁했던 1948년 대선과는 그 양상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또 조지 W 부시에서 버락 오바마로, 또 오바마에서 트럼프로의 정권 교체는 트루먼에서 아이젠하워로 바뀐 정권 교체와는 성격이 다르다. 21세기 들어 미국은 대선에서의 승자와 패자에 따라 국정 방향이 판이해지는 현상이 심해진 것인데, 이번 대선은 그야말로 사생결단(死生決斷)의 싸움판이 되어 버렸다.

사생결단이라면 한쪽이 패배하면 끝이 나야 하는데, 이 게임에선 패배해도 대립은 그대로 지속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커진다.

미국 대선은 공화당과 민주당을 대신해서 폭스뉴스와 MSNBC가 치르는 양상을 보인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폭스뉴스와 트럼프를 반대하는 MSNBC를 동시에 시청하는 일반인은 많지 않다. 자기와 성향이 다른 뉴스 채널은 비위가 상해서 더는 보지 않는다. 폭스뉴스를 보는 사람은 그것만 보고, MSNBC를 보는 사람은 역시 그것만 본다. 확고한 성향의 시청자층을 의식한 뉴스 채널은 그들을 잡아 두기 위해 보다 강력하게 상대방을 비판하고 보다 철저하게 자기 쪽을 옹호한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하든 바이든이 승리하든, 이러한 극단적 대립은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 분열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양쪽 군대에서 70만 명이 사망한 남북전쟁이 기껏해야 노예제도를 두고 싸웠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낙태와 동성결혼에서 환경정책과 세금까지 거의 모든 이슈를 두고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게 오늘의 미국이다. 어느 학자는 오늘날 미국 정치가 1930년대 초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지적한다.

1차 대전에 패배한 후 독일은 새 헌법에 근거해서 바이마르공화국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피폐한 경제는 극심한 혼란을 불러왔고, 패전 책임을 두고 논란이 이는 등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바이마르 헌법은 완전한 비례대표제를 채택해서 많은 정당이 의회에 진출했다. 내각은 불안한 연정에 의존해야만 했고, 사민당 등 민주정당에 대한 지지는 줄어들고 공산당이 세력을 늘려가더니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치당이 급속하게 부상했다. 공산당과 나치당은 각기 민병대 조직을 갖추고 서로 세력을 과시했다.

1930년 총선에서 사민당에 이어 원내 2당이 된 나치당은 1932년 총선에선 230석을 얻어서 1당이 됐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의사당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하자 히틀러는 다른 우익 정당들의 지지를 이끌어서 수권법을 통과시켜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기성 정치권이 분열과 대립을 치유하지 못하더니 나치의 일당 독재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 후의 일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우리 정치에서 비주류 집단 절멸돼

우리나라와 미국은 소선구제를 운영하기 때문에 극우당이나 극좌당이 의회에 진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은 우리가 과거에 보아왔던 두 정당의 모습과는 아주 다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데는 공화당 자체가 우경화한 데 힘입은 것이다. 비록 바이든이 대통령 후보가 됐지만, 민주당 내 버니 샌더스나 엘리자베스 워런 같은 급진파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각각 오른쪽과 왼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으니, 중간지대에 있는 유권자들은 선거 때마다 어디가 덜 나쁜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 사정도 비슷하다. 과거에는 여당과 야당에 비주류가 있었다. 이들은 교조적인 주류와 달리 유연하고 실용적 성향을 띄었다. 그러나 2017년 대선과 2020년 총선을 거치면서 이런 비주류 집단은 절멸되어 버렸다. 2016년 총선에서 진영 논리와 계파 패권주의를 타파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등장했던 국민의당은 내분과 리더십 와해로 자멸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험악한 막말과 궤변을 쏟아내는 정치판은 양극화된 정치의 결과물이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와 같은 극심한 분열이 독재를 불러온다고 걱정하는 학자도 있지만, 우리나라에 히틀러가 나타나거나 미국 대통령이 푸틴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끝이 안 보이는 대립과 분열만 계속될 가능성이 있으니, 그 종착역은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파국일 것이다. 이런 파국을 피하려면 그래도 당파 정치에서 자유로운 인사들 중심으로 원탁회의라도 만들어서 국민 통합을 위한 진솔한 노력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본다. 대립하는 양쪽의 포화를 받아 내고 중화시킬 수 있는 제 3지대를 다시 조성할 필요도 절실하다.

뉴스 채널이 미국 사회의 분열 조장하나

뉴스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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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방송법은 방송 편성의 자유와 독립이 보장된다면서도, 방송 보도는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공정성 원칙이 편성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1987년 연방통신위원회(FCC)가 공정성 원칙(fairness doctrine)을 폐기했다. 방송 주파수는 제한된 공공재이기 때문에 방송 보도는 공정해야 한다는 이 원칙이 방송사의 표현의 자유를 저해하며 케이블 채널이 생김에 따라 주파수의 공공성도 의미를 상실했다는 이유에서였다.

1980년 방송을 시작한 CNN이 24시간 뉴스 채널이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공정성 원칙이 폐기된 후에 루퍼트 머독이 설립한 폭스뉴스는 96년 방송을 시작할 때부터 보수 성향임을 내걸어서 대성공을 이루었다. 흔히 미디어는 진보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이야기해 왔는데, 폭스뉴스의 성공에 힘입어 방송에서는 오히려 보수 쪽으로 운동장이 기울었다는 말마저 나오게 됐다. 2000년 대선에서 조지 W 부시가 승리를 거둔 데는 방송환경 변화의 영향도 있었다.

또 다른 뉴스 채널인 MSNBC는 96년에 방송을 시작했으나 특정한 성향을 지향하지는 않았다. 충성도가 높은 시청자를 확보하지 못한 MSNBC는 시청률이 저조할 수밖에 없었는데, 2005년부터 진보 성향으로 편성하자 시청률이 높아졌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폭스뉴스와 MSNBC가 사사건건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는 데다 CNN마저 트럼프에 대해 연일 각을 세우고 있어 뉴스 채널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다. 이 같은 뉴스 채널 때문에 미국 사회의 분열이 심화하였는지, 아니면 분열된 사회를 방송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판단이 다를 것이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