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에 건설됐지만 밀림 속에 잠들게 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
학자들은 이곳이 폐허가 된 배경에는 엘니뇨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신데믹 위기> ⑤인류 생존의 길은 '공생'신데믹>
엘니뇨로 가뭄이 계속되고 벼농사가 타격을 입으면서 사람들이 농경지도, 도시도 다 버리고 떠났다는 것이다.
멕시코 등 중남미에서 찬란한 꽃을 피웠던 마야문명. 16세기 기후 변화와 가뭄으로 농업이 붕괴하면서 쇠퇴해버렸다.
16세기 남미의 잉카문명이 168명에 불과한 스페인 군대에 무너진 것은 천연두 바이러스 탓이 컸다.
기후변화와 전염병으로 문명이 몰락하는 것을 먼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까.
신데믹 맞은 21세기 인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코로나19)이 발생한 지 9개월 남짓한 기간에 전 세계에서 10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최근 미국 워싱턴대학 연구팀은 각국 정부가 사회적 거리 두기나 집합 금지 등을 완화할 경우 내년 1월까지 330만 명이 사망할 것이란 최악의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2003년 여름 유럽에서는 폭염으로 3만5000여 명이 사망했다.
국내에서도 최악의 폭염을 기록했던 지난 2018년 4301명의 온열 질환자가 발생했고 이 중 48명이 사망했다.
현재 폭염 발생일(일 최고기온 33도를 넘는 날)의 전국 평균은 연간 11일이다.
11일보다 많은 '심각한 폭염'에 노출되는 인구가 현재는 1250만명(25%)이지만, 2050년대엔 2800만 명(58%)에 이를 것으로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에서는 예측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미세먼지 오염으로 인해 한 해 700만 명이 조기 사망한다.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은 최근에 낸 ‘팬데믹과 문명’이란 책에서 인류를 위협하는 이러한 복합위기‘를 기독교 구약성경의 ‘탈출기(Exodus)’의 10가지 재앙에 비유했다.
모세가 고통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데려 나오려는 것을 반대한 파라오에게 야훼(여호와)가 내린 재앙이다.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여러 재앙이 한꺼번에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른바 신데믹(Syndemic)이다.
절대 쉽지 않은 전쟁
여러 재앙 가운데 당장 코로나19부터도 쉽게 극복하기 어렵다. 백신이나 확실한 치료제도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에 이어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부부까지 코로나19에 감염됐다.
78억 인류 누구든 감염될 수 있고, 나이가 많거나 기저 질환이 있다면 목숨도 위험한 상황이다.
기후변화와 미세먼지 대응도 간단하지 않다.
2015년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파리 기후협약이 마련됐으나, 뚜렷한 성과는커녕 미국의 탈퇴 선언 같은 난관만 부각되고 있다.
최근 미국 스탠퍼드대학과 중국 베이징대학 등의 연구에 따르면, 2006~2017년 사이 중국이 대기오염물질인 아황산가스 배출을 70%까지 줄였는데, 이는 북반구의 기온을 0.12도 상승시킨 것으로 평가됐다.
미세먼지를 잡으려다 온난화를 부추긴 셈이 됐다.
러시아 연구팀에 따르면,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산업화와 대기오염으로 인해 1960년대 이후 2만4000㎢의 침엽수림이 고사했다.
최근 시베리아 기온 상승이 거대한 산불로 이어진 것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연구팀은 지난달 ‘사이언스’에 기고한 논문을 통해 각국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가 더욱 악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현재 전 세계 강과 바다로 흘러드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연간 2400만~3500만톤인데, 10년 뒤에는 5300만톤 수준으로 늘어나리라는 것이다.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unacceptable)’ 수준이라는 800만 톤의 6배가 넘는 양이다.
약한 고리를 파고드는 재앙들
미국 에모리대학과 유타대학 연구팀이 최근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미국 내 코로나19 감염자 비율이 인종에 따라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편향성을 제거한 통계 분석 결과, 백인 1000명당 감염자 수를 1로 했을 때 아시아인은 0.6명, 흑인은 1.3명, 히스패닉 1.6명, 기타 1.6명 등으로 분석됐다.
일본 도쿄 성(聖)루가 국제병원 연구팀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 뉴욕에서 코로나19 사망자와 입원 건수는 저소득지역인 브롱크스에서 가장 많았고, 부유한 맨해튼에서 가장 낮았다.
적절한 위생 상태와 구급차를 통한 병원 접근, 건강보험 시스템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연구팀의 분석이다.
질병 감염뿐만 아니라 방역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나 도시 봉쇄의 경우 도시 영세 자영업자에게 경제적 피해가 집중된다.
저소득층일수록 소득이 더 줄고 일자리를 잃을 위험도 커진다.
세계적으로도 고향을 등진 난민이나 분쟁지역 주민들이 코로나19로 인해 더 큰 고통을 받는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부터 공격하는 셈이다.
인류는 코로나19 상황에서 편견과 이기심을 그대로 노출했다.
백신을 먼저 확보하려는 ‘백신 내셔널리즘’, 마스크 등 의료용품을 외교에 활용하는 ‘마스크 외교’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일부 부유층이나, 일부 부강한 나라만 코로나19에서 벗어난다고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는 없다.
이기심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승리할 수 없다.
지난달 21일 세계보건기구(WHO)의 발표는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희망을 갖게 한다.
WHO는 “국제 백신 공급 체계인 코백스(COVAX)에 64개 고소득 국가가 가입했고, 향후 92개 저소득 국가도 재정지원을 받아 가입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이렇게 되면 전 세계 인구의 64%를 차지하는 156개국이 백신을 접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각국의 참여가 확정되면 COVAX는 파트너 백신 제조업체와 및 개발자와 공식 계약을 체결, 내년 말까지 코로나19를 종식하는 데 필요한 백신을 확보할 전망이다.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그리스 신화에서 최초의 여성 판도라는 남편 에피메테우스가 보관하던 상자(항아리)의 봉인을 열었다.
상자 속에서 죽음과 병, 질투, 증오 등 인간에게 해가 되는 온갖 재앙이 빠져나왔다.
놀란 판도라가 황급하게 뚜껑을 닫은 덕분에 희망만 겨우 상자에 남았다.
신데믹 위기에 처한 인류, 마스크를 쓰고 버티는 인류 '호모 마스쿠스(Homo maskus)'에게도 판도라의 상자처럼 희망은 아직 남아 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인류 생존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생태적 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즉 현명한 인간이라는 자화자찬을 접고, 다른 생명과 공생하겠다는 뜻의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us)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신데믹의 해법으로 공생(Symbiosis)을 제시한 것이다.
공생은 배려이기도 하다.
전염병과 환경파괴 피해가 집중되는 사회적 약자, 지금 당장 목소리를 낼 수 없고 기후변화와 플라스틱 쓰레기를 떠안을 미래세대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인류가 훼손한 지구생태계에서 점점 벼랑 끝으로 몰리는 다른 생물 종에 대한 배려도 빼놓을 수 없다.
김명자 전 장관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명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세계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며 “고대로부터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원리를 복원시켜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간의 생태계 파괴는 인간이라는 종 자체의 파멸까지도 수반하고, 인간 자체가 지구라는 숙주를 위협하는 바이러스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서 답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마치 숙주의 생명이 끝남으로써 바이러스도 함께 사멸하게 되는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다.
지속가능성 확보해야 인류도 생존
신데믹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고, 소외된 이웃과 미래세대를 배려하고, 자연과의 공존을 이뤄야 한다.
지난 7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 연구팀이 국제저널 '사이언스'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자연을 보존하는 데 들어가는 돈은 더는 손실이 아니다.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삼림 등 생태계를 보호해야 하고, 여기에는 연간 220억~310억 달러(25조~36조 원)의 비용이 들어가는데, 삼림 벌채 감소에 따른 온실가스 감소 혜택을 고려하면 비용은 180억~270억 달러(21조 ~31조 원)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코로나19로 2020년 전 세계는 국내총생산(GDP)합계로 최소 5조 달러(5580조 원)의 손실이 발생할 전망이다.
최재천 교수는 “코로나19 등 지금의 상황은 이대로는 절대 안 된다, 자연을 보살피는 게 손해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그는 “이 기회를 살려 학교에서든, 시민 교육이든 환경 교육을 강화해 시민 인식 수준을 높이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조금씩 변화의 조짐도 나타난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지난달 22일 유엔총회 화상 연설에서 “중국은 2030년 이전에 이산화탄소(온실가스) 배출량 정점을 찍은 뒤, 2060년 이전에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탄소 중립은 화석연료 사용에 따른 배출량과 삼림을 통한 흡수량을 맞춰 온실가스 순 배출량을 제로로 만든다는 의미다.
한국 국회에서도 지난달 24일 ‘기후위기 비상 대응 촉구 결의안’을 의결했다. 기후변화를 기후위기로 공식 규정하고,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 배출 제로 목표를 담았다.
김 전 장관은 “지구촌이 당면한 복합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사회·환경 정책이 조화를 이루는 정책, 지속 가능한 발전으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답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지속성’, ‘형평성’, ‘효율성’이 담보되는 발전관을 의미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복지-경제-환경 정책 간에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상호관계의 정립을 강조하고 있다.
윤제용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장은 “기존 방식으로는 더는 어렵고 새로운 사회로 가기 위한 해결책, 변화의 모멘텀(계기·동안)이 필요하다”며 “그게 바로 전환적 뉴딜(New Deal)”이라고 말했다. 환경보전·경제회복·사회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윤 원장은 “전환적 뉴딜을 추구하면 사회의 운영방식이 바뀌게 되고 기존 이해관계가 바뀌게 돼 갈등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며 “재생에너지 확대나 순환경제 추진 등에서처럼 사회적 합의를 이뤄나가야 하고, 그런 역량을 키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천권필 기자 kang.chansu@joongang.co.kr
신데믹(Syndemic)은...
신데믹은 2개 이상의 유행병이 동시 혹은 연이어 집단으로 나타나면서,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사태를 악화하는 것을 말한다.
1990년대 중반 미국 코네티컷 대학의 의학 인류학자 메릴 싱어가 처음 사용한 용어다.
‘신(syn-)’은 ‘함께’ 혹은 ‘동시에’ 뜻을 가진 접두사이고, ‘데믹(-demic)’은 유행병(epidemic)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