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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부모처럼 살고 싶단 생각 들게 하는 게 최고의 교육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신성진의 돈의 심리학(79)

은퇴프로그램 강의를 준비하면서 『임계장 이야기』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임계장 이야기』는 공기업에서 정년퇴직 후 저자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잘 모르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임계장이란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입니다.

이책이 의미 있게 다가온 이유는 아파트 경비원, 건물 경비원 등으로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 임계장의 전직이 모두가 부러워하는 공기업 정규직 은퇴자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평생 안정되고 소득이 높은 공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일한 후 정년퇴직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이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저자가 은퇴할 즈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여러 가지 일이 발생합니다. 큰딸이 결혼을 하게 되고, 똑똑한 아들이 로스쿨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리고 퇴직 전에 대도시로 발령이 나 이사를 위해 대출을 받게 됩니다. 이런 일이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결혼할 나이가 된 딸이 결혼하는 것, 공부 잘하는 아들이 로스쿨에 진학해 더 공부하고 싶어 하는 것, 이사를 위해 대출을 받는 것 모두 아주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측하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주거비용과 자녀 결혼비용, 자녀 학자금 지출이 퇴직과 함께 한꺼번에 다가왔을 때 저자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퇴직 이후에 지인의 소개로 재취업을 하지만 직장 내 젊은이들이 자신을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서 임계장은 결심합니다. “차라리 몸으로 부딪히면서 사는 게 낫겠다.”

『임계장 이야기』는 단순히 한 노인의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고령화, 비정규직 노동자, 노인취업 문제 등 다양한 숙제를 안겨줍니다. [중앙포토]

『임계장 이야기』는 단순히 한 노인의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고령화, 비정규직 노동자, 노인취업 문제 등 다양한 숙제를 안겨줍니다. [중앙포토]

여기서 그의 어려움은 시작됩니다. 고속버스 배차장, 아파트 경비, 빌딩 경비…. 이런 일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 아파트 주민의 행패를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버린 아파트 경비원의 고통에 관해 쓴 기사를 읽으면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함께 분노하게 됩니다. 임계장이 겪은 일을 제가 겪었다면 과연 이겨낼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임계장 이야기』는 단순히 한 노인의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고령화, 비정규직 노동자, 노인취업 문제 등 다양한 숙제를 안겨줍니다. 마음이 무겁고 두려워집니다. 많은 분이 함께 읽고 공감하고 문제 해결에 나서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읽고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를 보는 눈과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인사라도 한 번 더 드리고, 아이들과 먹으려고 샀던 아이스크림 하나라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책을 읽고 나서 김형석 교수의 책 『백 년을 살아보니』를 다시 뒤적여봤습니다. 책 내용도 내용이지만 100세가 되도록 기고, 책 쓰기, 강의를 계속하는 모습을 보면서 멋있다는 생각도 들고, 저렇게 살고 싶다는 욕심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김형석 교수의 책을 대학 신입생이던 형의 소개로 처음 접한 것은 고1 때였습니다. 30년이 조금 넘었는데, 그때 김형석 교수는 연세대학교 노교수였습니다. 아마 은퇴를 몇 년 앞둔 교수였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수필집으로 평가받는 『사랑과 영원의 대화』를 읽으며 그때도 '이분처럼 나이가 들었을 때 멋진 글을 쓰고 청년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김형석 교수의 삶은 참 닮고 싶은 모습인 것 같습니다.

“은퇴 이후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은퇴 이후에 어떤 삶을 계획하고 계시나요?”

50이 넘어 주변 선후배 친구들이 일차적인 은퇴를 하게 되고, 다양한 모습을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멋진 은퇴자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갑자기 은퇴해 준비 없는 상태로 노후의 삶을 맞이하게 됩니다.

은퇴 이후 우리의 모습은 김형석 교수와 임계장 사이 어디쯤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르치고 글 쓰는 삶이 최고라거나, 경비원의 삶이 피해야 하고 거부해야 하는 삶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삶,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과 자녀가 내 이야기를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삶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형석 교수는 70년 정도를 비슷한 일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내고 학생을 가르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리고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아마도 그렇게 살 것 같습니다. [중앙포토]

김형석 교수는 70년 정도를 비슷한 일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내고 학생을 가르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리고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아마도 그렇게 살 것 같습니다. [중앙포토]

일차적인 퇴직을 고민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 임계장보다는 김형석 교수의 삶에 가까워지려면 어떤 생각,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생각해 봤습니다.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생각을 좀 하면서 은퇴 이후를 준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형석 교수와 임계장의 가장 큰 차이는 일입니다. 김형석 교수는 70년 정도를 비슷한 일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내고 학생을 가르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리고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아마도 그렇게 살 것 같습니다.

평생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 많은 교수가 있지만, 은퇴 후 김형석 교수처럼 활동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쌓아 온 경험과 역량을 은퇴 이후에도 계속 활용할 수 있도록 변화와 노력을 해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삶에 어떤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는지 미리 점검하고 대비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녀가 언제쯤 결혼할 것인지, 진학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나는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고 어느 정도까지 지원해 줄 수 있는지 꼼꼼하게 점검해 보고 필요하다면 미리 기준을 정해 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에게 무작정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한계를 정해두는 것도 지혜로운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자녀의 성장을 지원하는 부모가 좋은 모습이지만 자녀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모습도 훌륭한 부모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퇴직 전까지 자녀 양육을 위해 고생하고 희생해왔다면 이제는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고, 배우자와 함께 행복한 노후를 살아내려는 노력과 태도도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자녀가 지원을 요청할 때 부모로서 거부하기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삶도 자녀의 삶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자신의 삶을 심각하게 훼손시킬 수 있는 결정은 은퇴 전후로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행복한 부모가 행복한 자녀를 만드는 법입니다. ‘우리 아빠, 엄마처럼 살고 싶다’는 말이 자녀에게 가장 좋은 교육이고 유산이지 않을까요?

세계 최고의 속도로 성장해 온 대한민국, 그 주역이 세계 최고로 늙어가는 대한민국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 더 신중하게 두려운 미래를 준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수많은 임계장에게 ‘예의’를 갖출 줄 아는 품격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재무심리센터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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