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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닷새뒤 불쑥 찾아온 김두한 "무기 달라, 참전하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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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70주년을 맞는 올해 창군 주역 고 김웅수(金雄洙) 장군(1923~2018)의 회고록을 유가족(딸 김미영씨)이 찾아 중앙일보에 전했다.

창군 주역 고 김웅수 장군 회고록②

2004~2005년 작성된 회고록에는 고 백선엽 장군과 함께한 ‘한반도 최단거리 방어선 진행 계획’, ‘화살머리고지 사수전’ 등 6·25 전쟁 일화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 등 눈여겨볼 만한 내용이 많다. 1일 제72주년 국군의날을 맞아 회고록의 주요 내용을 연재한다.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강렬한 인상 

김 장군은 회고록에서 6·25 전쟁 중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애국청년 김두한씨의 방문’을 꼽았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30일 김 장군이 육군 수도사단 참모장으로 있던 때다.

“어떤 사람이 사단장의 면담을 요구한다고 했지만, 사단장은 육군본부에 가 있어 대신 내가 면회했다. 이름이 김두한이라고 하였다. 면담 요지는 자기 밑에 약간의 청년들이 있으며 이런 어려운 시국에 자기들이 무장하여 일선 방어 임무에 가담하도록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박정희(오른쪽) 전 대통령과 김두한. [중앙포토]

박정희(오른쪽) 전 대통령과 김두한. [중앙포토]

김두한을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었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다고 했다.

“일찍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셨던 조부님(독립지사 김조현)을 따라 나는 돌 무렵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독립군 부락에서 살았으며 부모님으로부터 그의 아버지 김좌진 장군 내외분에 관해 많이 들어왔다. 또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자 일제 때 종로를 주름답던 두목 김두한의 이야기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식 군인이 아닌 한 개인의 참전 요청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김 장군은 김두한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김두한씨에게 군인들에게도 태반이 부족한 무기 사정과 함께 훈련 없이 애국심만으로 싸울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일선 배치 대신 후방 소란을 막는데 전력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한 후 돌려보냈다.”

김 장군의 마음을 뒤흔든 김두한과의 인연은 이후 다시 이어졌다.

“내가 1951년 이종찬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비서실장으로 재직할 때 육군본부에서 다시 그를 만나게 됐다. 그때는 군이 북으로 진격 중이었다. 면담의 요지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청년들을 비행장을 건설하는 데라도 써 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실로 그의 용기와 애국심에 감탄했다.”

그리고 김 장군은 훗날 그의 인생사가 ‘장군의 아들’로 영화화된 것을 알고 전쟁 중에 있었던 일화를 미리 전달하지 못했던 걸 아쉬워했다.

김홍일 장군의 한강 방어선 

김 장군은 광복군 출신으로 윤봉길 의사에게 도시락 폭탄을 건넨 김홍일 장군을 6·25 전쟁을 거치며 더욱 존경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가 6·25 전쟁 전 육사 생도대장과 전술대장을 지내게 된 것도 흠모하던 김홍일 장군이 육사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격을 갖춘 지도자 밑에서 군대 생활을 할 수 있어 보람을 느꼈다”는 그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한강 방어선을 구축한 김홍일 장군의 공적도 상세히 소개했다.

6·25전쟁 당시 한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엿새간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한 김홍일(1898.9~1980.8) 장군. [전쟁기념관 제공]

6·25전쟁 당시 한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엿새간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한 김홍일(1898.9~1980.8) 장군. [전쟁기념관 제공]

“수도사단이 한강선에 배치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50년 6월 26일 육군본부의 작전회의 때 육사 교장이던 김홍일 장군이 참석했다. 김홍일 장군은 서울 방어를 위해 병력을 창동 미아리 방면에 투입하는 대신 부대를 철수해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준비할 것을 건의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김홍일 장군은 28일 한강교의 폭파와 국군의 무질서한 후퇴를 보게 됐다. 그는 상부의 명령 없이 후퇴하는 병력을 도왔다. 결국 한강 남쪽으로 철수한 육군본부는 김홍일 장군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사후 소급 발령해 한강선 방어전을 지휘케 했다.

한강선에서 국군이 6일간의 지연작전을 성공적으로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은 김홍일 장군의 애국심과 적절한 판단, 지휘력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약 55년이 지난 후 김 장군은 한강 방어선을 회고하며 “지금도 한강 변에 김홍일 장군과 이름 없이 조국의 위난에 생명을 바친 무명 학도병들을 기리는 동상이 제막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적었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 효사정공원에 설치된 한강방어선 노량진 전투지 표지판. [서울시 제공]

서울 동작구 흑석동 효사정공원에 설치된 한강방어선 노량진 전투지 표지판. [서울시 제공]

안동 철수작전 

김 장군은 김홍일 장군과 뼈아픈 실패도 함께 경험했다. 김 장군은 “나는 군단 경험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안동 철수작전에서 얻었다”고 기술했다. 1950년 8월 해당 작전이 실시될 당시 제1군단장은 김홍일 장군이었다.

수세에 빠진 국군이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시기였다. 경비행기로 투하되는 통신통을 미군 고문관들이 늦게 확인하는 바람에 철수 명령이 제때 전달되기 어려워졌고, 김 장군은 수도사단에 직접 철수 명령을 전달하기로 했다. 안동교를 건너 연대본부에 철수 명령을 전달했지만 돌아오는 길이 문제였다.

김홍일(맨 앞 가운데) 장군, 김웅수(맨 앞 오른쪽) 장군이 1949년 육사 동료들과 한 자리에 모였다.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김홍일(맨 앞 가운데) 장군, 김웅수(맨 앞 오른쪽) 장군이 1949년 육사 동료들과 한 자리에 모였다.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날이 밝기 전에 안동교를 건너기 위해 하산을 시작했다. (중략) 날이 밝아오면서 안동교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안동교의 북쪽 입구가 적의 기관총 사수들에게 점령돼 이쪽을 보고 사격 중이었다. 같이 물에 들어간 병사 중에는 기관총에 맞아 불귀의 객이 되는 병사도 있었다. 나는 수영에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물은 깊지 아니해 물살에 떠내려가면서 뭍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 장군은 “결과적으로 철수 명령이 늦어 철수를 엄호하는 전술적 전개에 지장을 줬고, 정연한 철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실패를 인정했다.

“나는 군단장(김홍일 장군)에게 작전의 도의적 책임이 있음을 지적하며 군단장으로서 사의를 표명할 것을 건의했다. 군단장이 사의를 표명했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군단장은 부대 철수 작전을 계기로 보직이 종합학교장으로 바뀌어 군단을 떠나게 됐고 나도 같이 종합학교에 부임하게 됐다.”

통한의 휴전 

3년간의 밀고 밀리는 전투 끝에 들려온 휴전 소식은 그에게 ‘통한의 기억'으로 남았다. 당시 제2사단장이었던 그는 1953년 7월 27일 정오 12시를 기해 사격을 포함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떠올렸다.

“막대한 군과 민의 인명과 재산 피해를 초래케 한 북의 남침을 응징 못 했으나 부하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 착잡한 심경을 표현키 어려웠다.”

휴전협정 직후 김웅수(오른쪽) 장군이 어두운 표정으로 미측 고문관과 철군을 확인하고 있다.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휴전협정 직후 김웅수(오른쪽) 장군이 어두운 표정으로 미측 고문관과 철군을 확인하고 있다.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김 장군은 남아있는 탄약을 모두 동원해 마지막 포격을 가했다. 그리고 그는 군단으로부터 받은 사격중지 명령을 오전 11시로 앞당겨 하달했다. 그는 “우리를 괴롭히던 적에 대해 최대한 해를 끼치는 동시에 상부의 휴전 명령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10월 3일 「김웅수 장군 회고록③」에서 계속

☞김웅수 장군은
1923년 외가인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독립지사였던 조부를 따라 만주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1945년 귀국해 서울대 법대 재학 중 국방경비대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 뒤 1946년 졸업 후 참위(당시 소위 계급)로 임관했다. 이때 국군조직법 통과를 위한 작업에 관여하는 등 국군 창설에 기여했다.

6·25 전쟁 중 백선엽 장군의 지명으로 육군 제2사단장이 돼 화살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전쟁 후에는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육군편제 개편위원장을 지냈다. 6군단장으로 있던 1961년에는 5·16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다 창군 동기이자 매제인 고 강영훈 전 국무총리와 함께 투옥됐다.

이후 형 집행면제 판결을 받고 풀려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72년부터 1993년까지 워싱턴 D.C. 카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그는 2018년 94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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