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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철원~원산 방어선 비밀리 추진" 무산된 휴전선 북상의 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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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70주년을 맞는 올해 창군 주역 고 김웅수(金雄洙) 장군(1923~2018)의 회고록을 유가족(딸 김미영씨)이 찾아 중앙일보에 전했다.

창군 주역 고 김웅수 장군 회고록①

2004~2005년 작성된 회고록에는 고 백선엽 장군과 함께한 ‘한반도 최단거리 방어선 진행 계획’, ‘화살머리고지 사수전’ 등 6·25 전쟁 일화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 등 눈여겨볼 만한 내용이 많다. 1일 제72주년 국군의날을 맞아 회고록의 주요 내용을 연재한다.

1953년 육군 제2사단장 시절의 고 김웅수 장군.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1953년 육군 제2사단장 시절의 고 김웅수 장군.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북쪽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휴전선

1954년 백선엽 당시 제1야전군 사령관이 김웅수 장군에게 선물한 친필 사인과 사진.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1954년 백선엽 당시 제1야전군 사령관이 김웅수 장군에게 선물한 친필 사인과 사진.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회고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백선엽 장군과 함께 치른 6·25 전쟁이다. 김 장군은 백 장군이 제2군단장으로 재직하던 1952년 참모장을 지냈고, 백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한 1953년엔 제2사단장을 맡았다.

그는 백 장군에 대해 “중요한 정책을 부하에게 일임하는 대신 자신이 직접 관여하고 확인하는 성격이었고, 나는 그가 군단장일 때 처음 같이 일하는 경험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그는 백 장군과 잊지 못할 회의에 참석한다. 한·미가 전쟁 중 한반도 최단거리 방어선(철원~원산)을 구상했던 회의다. 당시 휴전선 인근에 형성된 전선을 최대한 북상시켜 철원과 원산을 잇는 전선으로 재구성한다는 계획이 등장했던 상황을 김 장군은 생생하게 증언한다.

6·25 전쟁 휴전 직전인 1953년 7월 백선엽(왼쪽)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화살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웅수 당시 제2사단장을 격려 방문했다.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6·25 전쟁 휴전 직전인 1953년 7월 백선엽(왼쪽)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화살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웅수 당시 제2사단장을 격려 방문했다.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김 장군은 “백 장군이 군단장으로 재직하던 1952년 어느 날 저녁 한·미 지휘부만 작전상황실에 모여 전선을 철원-원산선으로 이동시키는 공격명령을 작성했다”고 적었다. 이는 미8군 사령관이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의 아이디어였다.

“심각한 표정의 군단장(백 장군)의 지시로 소수 지휘부만 군단 작전실 천막에 모였다. 거기에선 현 방어선을 한반도의 최단 방어선이 될 수 있는 선으로 변경하고자 하는 미8군의 계획이 다뤄졌다. 우리는 공격 방향과 진출선에 관한 계획, 그리고 보안에 대해 논의했다. 신나는 진격과 전투가 예상됐다.”

6·25 전쟁 중인 1952년 강원 화천군 소토고미 2군단을 방문한 밴 플리트(맨 앞 왼쪽 네번째) 장군, 백선엽(〃 다섯 번째) 장군, 김웅수(맨 앞 오른쪽 첫 번째) 장군.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6·25 전쟁 중인 1952년 강원 화천군 소토고미 2군단을 방문한 밴 플리트(맨 앞 왼쪽 네번째) 장군, 백선엽(〃 다섯 번째) 장군, 김웅수(맨 앞 오른쪽 첫 번째) 장군.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하지만 철저한 비밀 속에 진행되던 계획은 불과 이틀 뒤 전격 취소됐다. 김 장군은 “사령관의 계획이 미 상층부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 같았다. 지금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계획이 실현됐다면 휴전선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란 회고다.

한반도 최단거리 방어선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이를 실현하려 한 밴 플리트 장군을 김 장군은 ‘한국군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군 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격전 중에도 훈련과 정비를 강화했고, 한국군의 증편도 가속했다. 그는 참으로 한국군의 아버지 역할을 한 사람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5년 10월 4일 상오 밴 플리트 전 사령관의 예방을 받고 환담하고 있다. 중앙포토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5년 10월 4일 상오 밴 플리트 전 사령관의 예방을 받고 환담하고 있다. 중앙포토

화살머리고지 사수

김 장군은 6·25 전쟁 격전지인 화살머리고지 사수의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다. 휴전을 앞둔 1953년 6월 말과 7월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국군 180여명, 중공군 1300여명이 사망할 정도로 치열했다. 1953년 5월 강원도 철원에서 제2사단장으로 부임한 김 장군은 당시 각오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철원평야를 수중에 넣기 위해선 백마산이 필요했고, 백마산을 위해선 여기에서 100m 떨어진 화살머리고지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했다. 적은 이 고지를 탈환하려고 휴전 전에 수차례의 노력을 했다. 적의 집요한 공격으로 두 차례 이 고지가 탈환된 적도 있었다. 이곳에서 나의 사단장 시절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나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철원평야를 확보하기 위해 백마고지를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 화살머리고지가 절실했다. 화살머리고지를 뺏기면 미 7사단이 정면으로 위협받는 상황도 초래될 수 있었다.”

문제는 휴전선 확정을 앞둔 북측 역시 화살머리고지 확보가 절실했다는 것이다. 반면 미군은 몸을 사리는 분위기였다. 김 장군은 “나의 관측으로 휴전이 가까워지면서 미군의 희생을 아끼는 (미) 상부의 눈치가 역력했다”며 “이러한 실정이 적으로 하여금 공세의 기회가 됐다”고 서술했다.

김웅수(오른쪽) 장군이 화살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으로 미군으로부터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받고 있다.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김웅수(오른쪽) 장군이 화살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으로 미군으로부터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받고 있다. [김웅수 장군 가족 제공]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김 장군의 한국군은 화살머리고지를 재탈환했고, 이를 통해 백마고지 능선을 확보했다. 그는 이 공으로 한국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미 정부로부터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받았다. 그는 “희생된 장병을 대신해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화살머리고지는 2018년 남북이 9·19 군사분야 합의를 체결한 뒤 공동으로 유해발굴에 나서면서 재조명됐다.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남북한 병력뿐 아니라 프랑스군, 중공군 등 모든 참전국 병력의 희생이 컸던 상징적 장소였기 때문이다.

☞김웅수 장군은
1923년 외가인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독립지사였던 조부를 따라 만주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1945년 귀국해 서울대 법대 재학 중 국방경비대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 뒤 1946년 졸업 후 참위(당시 소위 계급)로 임관했다. 이때 국군조직법 통과를 위한 작업에 관여하는 등 국군 창설에 기여했다.

6·25 전쟁 중 백선엽 장군의 지명으로 육군 제2사단장이 돼 화살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전쟁 후에는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육군편제 개편위원장을 지냈다. 6군단장으로 있던 1961년에는 5·16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다 창군 동기이자 매제인 고 강영훈 전 국무총리와 함께 투옥됐다.

이후 형 집행면제 판결을 받고 풀려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72년부터 1993년까지 워싱턴 D.C. 카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그는 2018년 94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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