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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50년] "못 참겠다···섬 탈출했다가 걸리면 자폭하자"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더 못 견디겠다. 섬을 탈출했다가 걸리면 자폭하자.”

1970년 11월 어느 날 자정쯤. 어두컴컴한 내무반 안에서 누워 있던 황OO 공작원이 헛기침 소리를 냈다. ‘기간병들의 감시망이 헐거워진 지금이 때’라는 신호였다. 잠든 동료들을 뒤로하고 황 공작원은 강OO·강OO 공작원과 함께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무기고로 들어가 수류탄 3개를 챙겨 하나씩 나눠 가졌다.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⑨]두 번째 탈영, 집단 성폭력

‘실미도 부대’에서 극단적 가혹 행위 일색의 훈련 도중 두 번째 탈영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는 공작원에게 약속한 훈련 기간(6개월가량)이 뚜렷한 설명도 없이 2년가량 초과한 상태였다. 한반도 정세가 전쟁 직전까지 갔다가 급격히 긴장이 풀리자 ‘김일성 모가지를 따겠다’던 실미도 부대는 하염없이 방치됐기 때문이다.

썰물 되자 무의도로 건너가

탈영병들이 자정 시간을 노린 건 기간병들의 감시망이 상대적으로 허술할 뿐만 아니라 썰물 때였기 때문이다. 썰물이면 실미도와 인근 무의도 사이에 바닷물이 빠지면서 폭 50m가량, 길이 300m가량의 모랫길이 만들어진다.

무의도로 건너간 세 공작원은 마을 여성 2명을 무의초등학교 숙직실로 끌고 가 성폭행했다. 무의초는 평소 야간 훈련 때 자주 찾았던 곳이라 범행 장소로 택했다. 그 사이 실미도 부대엔 비상이 걸렸다. 무장한 기간병과 공작원들이 달아난 3명을 추적하기 시작했고, 우선 익숙한 무의초로 향했다. 탈영병들이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직감은 들어맞았지만 성폭력이 벌어진 뒤였다.

8월 25일 무의도에서 바라본 실미도. 썰물 때라 육지 길이 만들어져 있다. 우상조 기자

8월 25일 무의도에서 바라본 실미도. 썰물 때라 육지 길이 만들어져 있다. 우상조 기자

집단 성폭력 후 민간인 12명 인질로

그런데 현장에는 예비군과 경찰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경찰이 사건을 처리하게 되면 비밀리에 결성된 실미도 부대가 외부에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추적조는 “우리가 처리할 테니 철수하라”며 경찰을 물렸다. 탈영병들은 어느새 성폭력 피해 여성뿐 아니라 어린이 9명, 교사 1명 등 총 12명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였다. 졸지에 탈영병이 된 공작원 세 명은 실미도로 끌려갈 경우 몽둥이로 맞아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

“황OO, 강OO, 강OO! 인질들을 풀어주고 자수하면 살려주겠다. 빨리 나와라.”

“개소리하지 마!”

자폭 시도 후 흉기로 극단적 선택

탈영병 3명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던졌다. 그러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대에서 수류탄인 것으로 알고 챙겨나온 무기가 사실은 연막탄이었던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굴을 딸 때 쓰는 도구가 눈에 띄었다. 3명은 도구를 이용해 서로의 복부, 목 등을 찔렀다. 인질들은 비명을 질렀다. 추적조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여기고 진압작전에 들어갔다.

“주변 가게에서 와룡 소주(인천의 3대 소주)를 사와 추적조 공작원들에게 1잔씩 먹인 뒤 ‘몽둥이를 들고 들어가 진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숙직실에 들어가니 탈영병들이 피를 흘리고 있어 들것으로 옮겼습니다. 상황은 새벽 3시에 끝났어요.”(김모 기간병·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면담)

탈영병 셋 가운데 황 공작원은 실미도로 옮겨지던 도중 사망했다. 강 공작원은 날이 밝자 유리창을 깨고 자해를 시도했다가, 파견대장의 지시를 받은 장모 공작원에 의해 대검으로 살해됐다. 다른 강 공작원은 실미도로 끌려와 내무반에 며칠 동안 치료 없이 방치됐다가 숨졌다.

8월 25일 인천 용유초등학교 무의분교(옛 무의초). 민간인 성폭력 사건의 발생 장소다. 우상조 기자

8월 25일 인천 용유초등학교 무의분교(옛 무의초). 민간인 성폭력 사건의 발생 장소다. 우상조 기자

동료들 시켜 화장한 후 바다에 버려

실미도 부대에선 반기를 든 공작원을 살해할 때마다 디젤유(Diesel油)로 화장한 뒤 남은 유골을 바다에 버렸다. 이번에도 지시를 받은 공작원들은 죽은 동료의 시신 3구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화장하는 날은 비가 왔는데 기간병들이 ‘빨리 처리하라’고 명령해 공작원들이 사체를 조각내고 태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료의 시신을 그렇게 처리했으니, 공작원들은 제정신일 수 없었을 거예요.”(이모 군무원·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면담)

1968년 7월부터 1970년 11월까지 총 7명의 공작원이 실미도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 가운데 6명이 탈출 등을 시도하다 불법 처형당했다. 더 큰 문제는 비극이 잇따르는데도 실미도 부대에서 군 수뇌부와 중앙정보부에 제대로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앙정보부 역시 부실한 보고를 검증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엔 위험하면 현지에서 즉결 처분하고 사후 보고하는 게 관례였습니다. 그리고 공작원들은 서류상 민간인 신분이었으므로 군법으로 처리할 수도 없었어요.”(한모 파견대장·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면담)

방치된 실미도 부대의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공작원과 기간병간 갈등 역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격화돼 갔다. 그러자 공작원들에 대한 회유책을 뽑아 든다. 다음 회에서 계속.

※본 기사는 국방부의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2006년)와 실미도 부대원의 재판 기록, 실미도 부대 관련 정부 자료, 유가족·부대 관련자의 새로운 증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심석용·김민중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지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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