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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하루 9시간 휴먼 다큐멘터리 빠져 계신 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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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30) 

“국민 여론을 그렇게 모르나? 네가 전화해 여론이 안 좋다고 말해라.”
TV 보시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나 코로나19 방역에 대한 의견이 아니다. 즐겨보시는 프로그램 중간에 광고 시간이 지나치게 길다는 불만이시다.

아버지가 요즘 흥미 있게 보시는 것은 보통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를 다룬 휴먼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이다. 원래는 30분 길이 5편이 한 작품으로 구성돼 월~금요일까지 한 회씩 방송되는데, 한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특선 100선’,‘걸작’,‘베스트’ 등의 이름으로 과거 방송을 묶어 한 번에 이어서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병원을 제외하곤 외출을 거의 하시지 않는 탓에 아버지는 평일에는 하루 2편 6시간, 주말에는 무려 3편 9시간 분량을 시청하신다. 그 5편 중 3편이 끝나면 어김없이 15분간 지속되는 광고가 마땅찮다는 말씀.

주말에 집에 함께 있어 보면 오전 10시경 첫 편이 시작되고 이를 다 보신 뒤 1시가 되어서야 점심을 드신다. (예전엔 오전 11시면 점심을 드셨다) 이후 잠시 쉬셨다가 3시에 시작되는 두 번째 이야기를 보시고 저녁을 드신다. 나의 평일 귀가 시간이 저녁 7시 경인데, 이즈음 마지막 한 편이 시작되어 밤 10시되서야 끝나 아버지의 긴 하루가 마무리된다. 나도 퇴근하고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면서, 먹으면서 아버지가 주무시기 전까지 자연스럽게 ‘인간극장’에 노출된다. 아버지는 나도 당신만큼 재미있어 하는 줄 알고 잠시라도 내가 자리를 비우면 그간의 내용을 설명해 주느라 분주하다.

워낙 오래된 프로그램이라 많은 이가 알 듯이 ‘인간극장’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드라마다. 남과 같은 삶, 평범한 이야기라면 방송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특이하거나 시사 한 바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힘든 상황에 처한 분이 고난을 이겨내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얘기가 많다. 예전엔 나도 흥미 있게 봤고, 30분이라는 시간이 짧게 느껴지곤 했다. 아버지가 아프신 데다 외출이 불가한 요즘에는 절로 눈물 나는 이야기를 하루 종일 대하는 것이 서글프다. 평일 저녁에는 그래도 이런저런 일로 분주하게 오가며 대충 넘어가면 된다. 그러나 주말 이틀 동안은 굳이 집중하지 않더라도 거실 TV 채널이 하루 종일 ‘인간극장’으로 고정된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5월 말 뇌졸중으로 입원했다가 퇴원하신 즈음 시작되어 벌써 넉 달째다. 언제 어떤 계기로 이 채널을 마주하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채널을 바꾸면 표정이 굳어진다. 3부 후 이어지는 15분 광고 소리가 듣기 싫어 (심지어 광고들은 순서도 내용도 바뀌지 않는 100% 고정이다) 채널을 잠시라도 돌리면, 4부 시간에 맞춰 정확하게 되돌리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신다. 그러잖아도 코로나 블루로 고생하는데,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이야기에 집착하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건강이 나빠지기 전엔 내가 좋아하는 음악 프로그램도 함께 보시고 트로트 열풍이 한창일 땐 출연자 이름을 외워가며 즐겁게 봤는데, ‘인간극장’에 심취하신 뒤론 그 모든 것의 우선이다.

혹여 내가 채널을 돌릴까 아예 주머니에 리모컨을 꽂고 ‘인간극장’을 시청 중이신 아버지. [사진 푸르미]

혹여 내가 채널을 돌릴까 아예 주머니에 리모컨을 꽂고 ‘인간극장’을 시청 중이신 아버지. [사진 푸르미]

아버지가 ‘인간극장’에 빠져들수록 나는 ‘인간극장’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익숙한 시그널 음악도 한결같은 아나운서의 내레이션도 싫어졌고, 3부 끝나고 나오는 광고에 등장하는 남자 성우의 코맹맹이 목소리에는 소름까지 돋았다. 언젠가 시각장애를 가진 아버지와 지적장애가 있는 딸이 함께 사는 이야기를 보던 중이었다. 방송을 보시며 간간히 읊조리듯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듣다 보니 아버지가 프로그램 속 부녀와 우리 부녀를 동일시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그램 속 딸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아버지에 대한 무한애정, 희생을 표현하는 순간 아버지가 속삭이셨다.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니 참 좋구나.”

그야말로 순수한 느낌을 말씀하셨을 텐데, 순간 내 마음에는 ‘설마,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에둘러 질책하시는 거야?’ 하는 못난 생각마저 들었다.

‘인간극장’을 두고 이어지던 아버지와 나의 긴장이 풀어진 건 의외의 순간이었다. 최근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에 나와 인기를 끈 정동원의 이야기를 다룬 인간극장을 함께 보게 된 것이다. 트로트 가수의 꿈을 키워주신 할아버지가 경연 도중 돌아가신 것을 알기에 나도 흥미롭게 봤고,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던 정동원이 객석의 할아버지를 향해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라고 말하는 엔딩 장면에선 아버지와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또 다른 트로트 가수 박서진의 이야기는 무려 3번이나 반복해서 봤음에도 볼 때마다 아버지와 나의 가슴을 후벼 팠다. 인기 가수로 승승장구하는 그의 현재를 알기에 소년 시절 그를 둘러싼 불행과 아픔을 담담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인간극장’에 매달리는 아버지를 보며, 어쩌면 ‘인간극장’과 함께 외로움을 이겨내고 계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늘 “참 하루가 너무 길다”, “하루 종일 혼자 있으니 말하는 것을 잊어버리겠다” 하시는 우리 아버지. 함께 지내는 딸이 있고, 멀리서 달려와 병원에 모시고 가는 딸도 있지만, 혼자 있는 그 순간은 여전히 깊은 고독 속에 몸서리치고 계신 것이다. TV 속에 나오는 사람들, 가족들의 모습을 나와 우리 가족에 대입하면서, 먼저 떠난 아내, 멀리 있는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건 아닌지.

추석 연휴 우리 집 거실 극장에선 ‘인간극장’이 절찬리 상영될 것이다. 코로나19로 언니들 방문도 쉽지 않고, 외식이나 나들이도 어려우니 ‘인간극장’의 독점 흥행이 전망된다. 아무쪼록 방송사에서 고도의 편성 능력을 발휘해 닷새나 되는 연휴 기간에 겹치지 않는 다채로운 이야기로, 가슴 아프고 슬픈 사연보다는 밝고 유쾌한 내용을 많이 다뤄주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추신: 비자발적 시청자의 한사람으로서 ‘인간극장’의 방송 취지나 수많은 출연· 제작진에 대한 불만을 다룬 것이 결코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코로나19가 빨리 사라져 학교에 가고 싶다는 조카 박선호의 그림. 과연 우린 자유로웠던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사진 푸르미]

코로나19가 빨리 사라져 학교에 가고 싶다는 조카 박선호의 그림. 과연 우린 자유로웠던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사진 푸르미]

공무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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