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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숭늉 그릇을 깬 만공 스님? 생각의 패러다임을 깨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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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선문답 일화는 수수께끼입니다. 그것도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저 ‘엉뚱한 이야기’로 치부하거나 무시해 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나면 다릅니다. 거기에는 대단한 놀라움과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그런 선문답 일화를 다루어보겠습니다. 정희윤 기자가 묻고, 백성호 종교전문기자가 답합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선문답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수월 스님과 만공 스님의 숭늉그릇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막막했고, 지금도 정말 막막하거든요.  
“일제 강점기 때 경허 선사라는 스님이 있었어요. 거의 꺼져가던 한국 선불교를 되살린 분이에요. 경허 선사에게 제자가 셋 있었어요. 수월, 혜월, 만공. 이 세 사람을 ‘경허의 세 달’이라고 불러요. 수월, 혜월 모두 달 월(月)자가 들어가잖아요.”
꺼져가던 한국 선불교의 불씨를 되지핀 경허 선사 진영. [중앙포토]

꺼져가던 한국 선불교의 불씨를 되지핀 경허 선사 진영. [중앙포토]

아, 잠깐만요. 그런데 만공 스님은요. ‘만공’에는 달 월자가 없잖아요. 왜 ‘경허의 세 달’이 되는 거죠?
“오~, 날카로운 질문이에요. 만공 스님 법명은 원래 월면(月面)이에요. 그런데 ‘만공’도 마찬가지에요. 가득찰 만(滿)자에, 빌 공(空)자거든요. 가득찬 달은 뭐에요?”
보름달이요.
“텅 비면 뭐에요?”
그믐달.  
“그런데 불교에서는 가득 찬 것이 텅 빈 것과 통해요. 또 텅 빈 것이 가득찬 것과 통해요. 보름달과 그믐달이 서로 통하는 거에요. 이렇게 보면 만공 스님도 경허의 달이 되는 거죠.”
다시, 숭늉그릇 이야기로 돌아가서요. 수월 스님과 만공 스님이 방 안에 있었어요. 수월 스님이 느닷없이 숭늉 그릇을 하나 ‘딱!’ 내밀었어요. 그러면서 “숭늉 그릇이라고 하지 말고, 숭늉 그릇이 아니라고도 하지 말고. 어디 한 마디 일러보소.’ 이랬단 말이에요. 이건 무슨 뜻이에요?
“수월 스님이 숭늉 그릇을 내밀었어. 만공 스님이 그걸 잡더니 방문 밖으로 나가는 거야. 그리고 마당에 숭늉 그릇을 던져버렸네. 어떻게 됐겠어요?”
와장창, 하고 깨졌겠죠. 숭늉 그릇이 아주 박살이 났겠네요.  
“네, 맞아요. 그릇이 박살이 났어요. 그런 뒤에 만공 스님이 다시 방으로 돌아와 앉았어요. 수월 스님이 뭐라고 했겠어요?”
글쎄요, 선배가 준 숭늉 그릇을 깼다고 야단을 쳤나요?  
“아뇨, 칭찬을 했어요. ‘참, 잘했네, 잘혔어’ 이렇게 칭찬을 했어요.”
엉? 이건 이상하잖아요. 누가 제게 수학문제를 줬어요. 그런데 제가 그 문제지를 찢어버렸어요. 그런데 ‘잘했네, 잘했어’하고 칭찬 받는 거랑 비슷하네요. 만약 시험지를 찢는 게 100점짜리 답이라면, 저는 시험볼 때마다 100점 받을 자신이 있어요. 호호.  
“그런데 여기에는 생각의 틀을 깨버리는 파격이 들어가 있어요. 가령 수월 스님이 숭늉그릇을 내밀며 ‘숭늉 그릇이라고 하지 말고, 숭늉 그릇이 아니라고도 하지 마라.’ 이 말을 하기 전에는 어땠어요? 만공 스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숭늉 그릇을 숭늉 그릇이라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문제가 언제부터 생겨났어요? 수월 스님이 그 말을 한 뒤부터 생겨난 거에요. 숭늉 그릇이라고 할 수도 없고, 숭늉 그릇이 아니라고도 할 수가 없게 된 거죠.”  
뭐에요....그러니까 수월 스님이 일종의 함정을 파놓은 거네요. 만공 스님이 거기에 걸려들지, 안 걸려들지 보면서 말이죠.  
“맞아요. 가만히 있던 만공 스님에게 올가미를 던진 거에요. 그 올가미가 뭐냐? ‘패러다임’이에요. 쉽게 풀어서 말하면 ‘생각의 틀’이에요. ‘슝늉 그릇이라고 해도 안 되고, 아니라고 해도 안 된다’는 패러다임이에요. 수월 스님의 그 말을 들으면 어떻게 돼요? 우리도 자신도 모르게 그 패러다임에 갇혀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문제와 고통이 시작되는 거에요. ‘숭늉 그릇이라고 해도 안 되고, 숭늉 그릇 아니라고 해도 안 되고..’ 그렇게 끙끙 앓는 거죠.”
그럼 만공 스님의 답은 어떻게 설명이 되는 거에요? 만공 스님은 왜 밖으로 나가서 마당을 향해 숭늉 그릇을 던져서 깨버린 거에요?
“그게 대단한 거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숭늉 그릇을 깨버린 걸로 보이지만, 사실은 수월 스님이 내민 패러다임을 깨버린 거에요. 그걸 깨버렸으니 만공 스님은 이제 어떻게 됐겠어요?”
숭늉그릇인가, 아닌가, 더 이상 고민 안 해도 되고 자유로워졌겠네요. 마음도 편해지고요.
“맞아요. 패러다임을 깨버렸으니, 이젠 숭늉 그릇이라도 해도 좋고, 숭늉 그릇이라고 안 해도 좋은 거에요. 자유로워 진 거죠.”
우와, 전혀 뜻밖의 결론이에요. 생각의 판을 뒤집어버리는 이야기네요. 이렇게 파격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는 줄 몰랐어요. 선문답이 단순한 수수께끼가 아니었군요.  
“그렇죠. 사람들은 살면서 저마다 ‘생각의 틀’에 갇혀서 살잖아요. 나에게 주어진 패러다임에 갇혀서 힘들어 하잖아요. 수월과 만공의 숭늉그릇 이야기는 그 틀을 깨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내 삶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패러다임을 깨라고 하는 거죠. 왜?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의 자리는 ‘만공’이거든요. 텅 비어 있기에, 가득 차 있다. 텅 비어 있기에 무한 창조가 가능한 거죠. 내가 틀어쥐고 있는 ‘생각의 틀’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생각이 나올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진리의 자리가 그렇게 생겼어요. 어떠한 틀도, 어떠한 패러다임도 없는 자리에요. 그러니까 살면서 하나씩 둘씩 내 생각의 틀을 깨나가면 어떻게 돼요? 우리가 진리에 점점 더 다가서게 되는 거죠. 덩달아 우리의 삶이 더 자유로워지고, 더 평화로워지는 겁니다.”  
아, 잠깐만요. 여기서 하나 따져봐야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기준이 필요할 때가 있잖아요. 가령 ‘학교에 지각하지 않으려면 아침 7시에 꼭 일어나야 돼’라든가, 저도 일하면서 ‘마감 시간 전에는 꼭 기사를 넘겨야 돼’라는 기준이요. 이런 기준까지 깨버리면 오히려 문제가 더 커지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서 필요한 패러다임도 있잖아요. 그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그런 패러다임은 우리의 삶을 가두지 않아요. 그래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요. 그러니까 깰 필요가 없죠. 예를 들어 집에 동생과 나만 있어요. 아침에 갑자기 동생이 배가 너무 아파서 구급차를 불러서 병원에 가야 될 심각한 상황이에요. 그런데도 나는 ‘절대 지각해선 안 돼’라는 기준 때문에 그냥 학교에 갔어. 동생을 그냥 집에 놔두고. 이럴 때는 어때요? 내가 가진 패러다임 때문에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발생하잖아요. 그럴 때는 어떡해요? ‘절대 지각해선 안 돼’라는 틀을 깨야하는 거죠.”
아하, 그러니까 문제를 일으키는 패러다임은 깨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주는 패러다임은 놔둬라. 이런 건가요?
“그렇죠. 나를 가두는 감옥, 나를 가두는 패러다임은 기본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든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숭늉그릇을 깨는 거에요. 생각의 틀을 깨는 거에요.”
왠지 속이 시원해지는 걸요. 마음도 편해졌어요. 저도 이제는 ‘생각의 틀’을 하나씩 깨나가는 연습을 해야겠어요. 다음 편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 건가요?
“다음에도 선문답을 하나 더 다루어 볼게요. 다음 편에서는 '왜 내 인생에만 돌풍이 보는 걸까?'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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