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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민간인 사살, 북에 이쯤은 받아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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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전쟁·정당방위 같은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살인을 사과로 퉁치는 곳은 없다. 경위야 어떻든 북한은 민간인 살해에 대한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번 사건에 대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사과가 이례적인 건 사실이다. 절대 틀릴 수 없다는 (무오류성) 김 위원장이, 그것도 남쪽 사람들을 향해 “대단히 미안하다”고 말할 거라곤 누구도 쉽게 짐작하지 못했다.

사살 명령자 수사한 뒤 기소 마땅 #국경 접근 시 사살 명령도 철회돼야 #북 저작권료 20억원으로 배상 가능

표류였든, 자진 월북이었든 사살된 곳이 북녘 바다였다는 것도 팩트다. 우리 공무원이 희생됐지만 이를 이유로 전면전을 일으키는 것은 적절치 않다. 전쟁이 날 경우 양쪽이 치러야 할 피해가 막대할 게 뻔한 탓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이번 사건이 그저 심심한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김 위원장의 말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여기에 걸맞은 최소한의 조치들이 뒤따라야 한다.

먼저 국제법상 북한 내의 누군가가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종전 선언에다 평화협정 논의가 분분하지만, 국제법상 남북한은 여전히 전시 상태다. 1953년 맺은 정전협정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 하지만 민간인 보호와 관련된 제네바협약은 “전투와 상관없는 모든 사람은 인도적으로 대우해야 하며, 살인·상해·학대·고문은 절대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울러 이 협약은 “(민간인 보호와 관련해) 중대한 위반행위를 하거나 이를 명령한 자는 체약국에서 수사하고 기소할 의무가 있다”고 돼 있다. 북한은 1957년 제네바협약에 가입했다.

다음으로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가 내려져야 한다. 북한은 “해상경계근무 규정이 승인한 행동준칙에 따라 사격했다”고 해명한다. 행동준칙이 어떤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번과 같은 비극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 지난달 말 북한 당국은 전례 없는 긴급포고문을 발표했다. “중국과의 국경 1㎞ 내로 들어오면 무조건 사살한다”는 내용이었다. 국경에서 이뤄지는 북한 주민과 중국인 간 접촉을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코로나19가 들어오는 것을 막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선 무조건 죽이겠다는 이 조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당국과 언론 모두 문제의 조치가 중국인과 북한 주민만을 겨냥했다고 여겼던 탓일 게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남쪽에서 넘어오는 월북자들도 똑같이 사살될 위험이 있다는 걸 능히 예상할 수 있었다. 작심한 월북자도 있지만, 실수로 북방한계선(NLL)을 넘는 어선들도 없지 않다. 통일부에 따르면 2011년 김 위원장 집권 이후 남쪽으로 송환된 월북자만 22명이다. 북한에 남은 경우까지 합치면 매년 적잖은 숫자가 넘어간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런데도 지금의 북한군 행동준칙이 계속된다면 비슷한 비극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국경 접근 시 무조건 사살’이라는 반인륜적 조치는 당장 철회하라고 북한 측에 요구해야 한다.

끝으로 북한은 적절한 배상을 해야 한다. 김 위원장 자신이 사살 사실을 인정한 만큼 북한 당국이 책임지고 피해자 가족에게 배상금을 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당국이 적절한 배상이 이뤄지도록 나서야 한다. 중요한 사실은 북한 당국이 거부해도 배상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국내에는 20억원가량의 북한 저작권료가 있다.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주도 아래 북한 방송의 영상 등을 사용하는 대가로 남측 미디어업계로부터 받은 돈이다. 따라서 숨진 해양수산부 공무원 유족들이 국내 법원에서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내면 배상받을 길이 열린다. 북한에 억류됐다 2015년 숨진 미국인 오토 웜비어의 유족도 같은 방법을 썼다. 이들은 미 법원에 소송을 내 승소하자 미국 내 김 위원장 은닉 자산을 압류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요구가 얼마나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입을 닫고 있는 것과 실현이 어렵더라도 정당한 요구를 외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자국민을 위한 최소한의 의무조차 외면한다면 이는 나라가 아니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