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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한·러 수교 30주년, 한국에 ‘톨스토이 하우스’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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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부교수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부교수

한국과 러시아가 공식 수교한 지 30일이면 꼭 30주년이다. 그동안 한·러 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교역 규모는 약 120배 증가해 러시아는 한국의 10위 교역국이 됐다.

러시아문화원 서로 도와 설립하면 #한·러 상호 문화 이해의 발판될 것

한국의 대외정책에서 러시아의 위상 조정도 이뤄졌다. 한국은 미·중·일·러의 지정학적 경쟁의 자장(磁場)에 위치한다. 미·중 패권 경쟁기에 한·일, 중·일, 러·일 양자 대립에다 북한 변수까지 한국 외교는 다차원의 함수를 풀어갈 수밖에 없다.

이런 지정학적 취약성을 역전시킬 전략으로 ‘중견국 외교’를 표방한 상황에서 러시아는 한국이 맺어갈 양자·다자 관계에서 효율적인 레버리지 역할을 해줄 수 있다. 러시아는 유럽이면서 유럽이 아니고, 아시아면서 아시아가 아니다. ‘이중적 타자’로서 그 독특한 위치가 이 역할을 가능하게 한다.

식민·분단·냉전으로 이어진 한국 근·현대사에 러시아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엔 러시아의 팽창주의가 한반도를 비껴갔다. 그 비밀이 ‘이중적 타자성’에 있다. 주변 4국 중 남북통일에 우호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적일 수 있는 나라가 러시아뿐인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은 이를 최대한 활용해야 하며, 이는 양국 국민의 공감으로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

수교 이전과 비교해 양국 국민의 상호이해가 진일보한 것은 분명하지만, 관계의 의미에 합당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2019년 조사에서 한국인의 66%는 ‘한반도 평화에 러시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미국·중국보다는 낮아도 일본보다는 13%포인트나 높았다.

반면 러시아에 대한 국가 친밀도와 위협도는 각각 0.1%와 1.1%로 미·중·일과 비교할 수 없이 낮았다. 대다수 한국인이 한반도 평화에 러시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도, 좋든 싫든 러시아는 한마디로 ‘존재감 제로’인 것이다.

한국인에게 러시아는 여전히 소련이라는 압도적인 기호에 갇혀 있거나, 오일머니로 살 만해진, 그러나 몰락한 제국의 이미지 사이를 오간다. 이 과장된 두려움과 부당한 폄하 사이 어디에도 ‘진짜 러시아’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한·러 양국이 2020~2021년을 ‘한·러 상호 문화 교류의 해’로 지정한 것은 시의적절하다. 문화 교류는 상대 국민의 마음을 얻는 공공 외교의 핵심이다. 수교 30년의 노력으로 양국 국민이 상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임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러시아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은 아직 낮지만, 지난해 러시아 극동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이 30만 명에 육박했다. 러시아의 한류 팬은 아직 인구의 2% 정도이지만 대도시 젊은이를 중심으로 팬덤이 확산하는 추세다. 코로나19 사태로 교류가 전면 중단된 것은 그래서 더 아쉽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예컨대 한국에 ‘러시아문화원’ 설립을 추진하는 것이다. 러시아에 한국문화원은 2006년 개원했지만, 2013년 양국 정상회담에서 거론한 한국의 러시아문화원은 감감무소식이다.

주변 4국 중 한국에 문화원이 없는 나라는 러시아뿐이다. 이는 러시아 정부만의 몫이 아니다. 문화원은 자국 문화 전파의 출구이자 상대 문화 수용의 입구이며 공공 외교의 기본 인프라다. 서로에 대한 관심을 잘 키워가기 위해서라도 러시아문화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서울 남산의 괴테 하우스나 프랑스문화원을 떠올려보시라.

러시아 정부에 문화원 건립을 촉구하면서 우리도 최대한 도울 필요가 있다. 수교 30주년을 맞아 러시아문화원이 마침내 등장한다면 지속가능한 상호 이해의 든든한 발판이 될 것이다. 한국인에게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가 가진 의미를 헤아려 그 이름을 ‘톨스토이 하우스’로 하면 어떨까. 수교 30주년, 한국인에겐 톨스토이 하우스가 필요하다.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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