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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인한의 퍼스펙티브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 완전한 해결 더 미루지 말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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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국민 생명 존중하는 정부가 되려면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건강 피해를 인정한 지 9년이 흘렀다. 내년이면 10주기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이미 과거의 일인 듯 일반인의 기억에선 흐릿해지고 있으나 이 사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보상받지 못한 피해자들과 그 가족의 아픔은 여전하다.

94년부터 이어진 참사로 1562명 사망, 5318명 피해 #참사 초기 정부가 수습에 실패하며 첫 골든타임 놓쳐 #피해자와 유족에게 더 이상 희망 고문 해서는 안 돼 #정부는 국민 안전 책임진다는 자세로 해법 내놓아야

2020년 9월 현재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 지원 종합 포털에 따르면 사망자 1562명, 생존 피해자 5318명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이 수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인지 모르는 채 사망한 피해자도 있는 것을 고려하면 그 피해 규모는 더 심각할 수 있다. 곧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 고문 속에서 오랜 기간 기다려오다 안타깝게 눈을 감는 피해자도 늘어가고 있다.

1994년부터 이어진 이 화학 참사에 대해 김영삼 정부 이래 현재까지 그 어떤 정부도 자유로울 수 없다. 2016년 9월 가습기 살균제 국정조사 당시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당시 대표와 우원식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장은 피해자를 찾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전적으로 정부 책임이다. 어떻게든 문제를 잘 해결하겠다”고 발언하였다. 현 정부 출범 후 2017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은 피해자를 청와대에 초청하여 공식으로 사과하며 “책임져야 할 기업이 있는 사고이지만 정부 역시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지원을 충실히 해나가겠다”고 말했었다. 김은경 당시 환경부 장관 역시 화학물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부도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9년 윤성규 당시 환경부 장관도 정부의 관리 감독이 철저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감성적 사과와 위로는 있었으나 구체적 방안이 진척되지 못해 피해자를 위한 현실적 대책을 체감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피해자들은 호소한다.

무산된 공청회, 개정된 시행령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연구 결과를 인용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67만명, 사망자는 1만4000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연구 결과를 인용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67만명, 사망자는 1만4000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지난 8월 5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릴 예정이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법 시행령 개정안 공청회가 무산되었다. 시행령안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 질환을 폭넓게 인정해 구제하자는 개정법의 취지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며 피해자 단체가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사태 해결의 핵심인 심사 대상 질환의 선정 기준이 시행령에 반영되지 않아 피해 구제 범위와 일정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 피해자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지적이었다. 또 정부가 배상에 준하는 지원을 하지 않음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기업과 법률 소송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 후 9월 15일 국무회의에서 개정 시행령이 의결되었고 환경부는 과거 구제급여와 특별구제계정으로 나뉘어 있던 것을 피해구제자금으로 통합하며, 가습기 피해로 인정되는 질환을 확대하고, 피해자의 소송을 지원하는 등의 개선을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피해자 단체는 개정 시행령에 여전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통합구제계정으로 일원화된다 해도 여전히 기존 특별구제계정 대상자는 법정에서 인과성이 낮다는 이유로 손해배상 청구 시 승소할 가능성이 작다는 점, 기업의 추가 분담금 납부 등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근거가 제시되지 않아 지속가능한 구제자금 확보에 차질이 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사태 이후로 겪고 있는 경제적 및 건강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기에 지원 수준이 턱없이 낮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엄밀히 이 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하다. 생명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살려내라는 안타까운 절규에도 불구하고 어떤 해결책도 피해자의 생명을 다시 살릴 수 없으며 건강과 시간을 다시 돌려놓을 수 없다. 해결은 복잡하고 요원해 보인다. 피해자의 바람이 다양하고, 법적인 보호 체계는 불완전하며, 개별 기업에 배상 책임을 맡기는 것은 무책임하며,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하루하루의 고통은 너무나 무겁다.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러한 복잡한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며 책임지는 것이다. 원죄는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고 판매한 기업에 있지만, 관리와 피해 대처에 실패하고 문제 발생 이후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직접적 책임이 정부에 있었다.

정부가 책임질 마지막 골든타임

미국의 위기 분석 전문가 나심 탈레브는 저서 『스킨 인 더 게임』에서 세계의 위기를 초래하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는 ‘책임지지 않는 인간’이라고 지적했다. 또 점차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국제 형세와 사회 환경 속에서 무책임하게 떠들기만 하고 자신의 말에 책임지지 않는 가짜 전문가가 만드는 문제를 경고했다. 그는 공정한 사회를 위해서는 책임의 균형이 이뤄져야 하며, 책임이 따르지 않는 논리는 전부 거짓이라고 강조한다.

기업의 사과와 인정이 늦고 정부의 초기 수습이 실패하면서 첫 번째 골든타임을 놓쳤다. 내년 8월이면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알려진 지 10주년이다. 10주년이라는 시간은 문제 해결을 위한 상징적 마지노선이다. 희망을 가지고 버텨온 피해자와 유족에게 희망 고문을 더는 계속해선 안 된다. 남은 1년을 해결을 위한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골든타임으로 여기고 정부는 지금까지의 약속에 대한 책임을 엄중히 생각해야 한다. 책임지지 않는 정부는 허상이다.

세계 유일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국 된 대한민국

가습기 사용자가 점차 늘어나던 시기인 1994년 11월 유공(SK케미칼의 전신)은 세계 최초로 가습기 메이트라는 이름의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물에 첨가하면 살균하는 제품을 개발했다는 광고와 함께였다. 건강과 가습기 위생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유사한 제품이 다수 등장한다.

충분한 연구를 거치지 않았으며 추가 흡입 독성 실험이 필요하다는 대학 연구진의 보고가 있었으나 무시되고 제품은 출시된다. 해외에서는 정화조 세정 등에 사용되는 폴리헥사구아니딘(PHMG), 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을 물에 타서 사람이 호흡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세정제를 물에 타서 사용한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제품 설명서에 명확히 물에 넣으라고 나와 있었다. 이 제품은 사람이 직접 흡입하지만 품질 경영 및 공산품 안전관리법에 따라 의약품이 아닌 공산품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식품위생법과 약사법에 의해 유해성을 검증할 의무 없이 판매되었다.

그로부터 17년 후 2011년 4월. 정체불명의 폐 질환 환자가 연이어 보고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단순 폐렴으로 보였으나 기존의 항생제와 항바이러스제가 듣지 않았고 심각한 폐의 섬유화 증세가 발견되었다. 급성호흡부전으로 사망자가 발생하며 역학조사가 시작된 결과 가습기가 원인으로 지목되기 시작한다.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으로 지목된 후에도 4개월간 회수 조처가 내려지지 않았다. ‘아이에게도 무해하다’는 광고와 함께 유통되다가 2011년 11월이 돼서야 판매 중단된다. 출시 이후 17년 동안 1000만병가량이 팔린 것이다. 민관합동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살균제 사용자 수는 8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2020년 현재 사망자 수는 1562명이다. 한국전쟁 이후 단일 사건에 의한 가장 많은 사망이다.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 교수·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