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제네바 협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강기헌 기자 중앙일보 기자
강기헌 산업1팀 기자

강기헌 산업1팀 기자

제네바 협약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탄생했다.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류가 양보해선 안 되는 가치를 담았다. 함수 그래프에 비유하자면 인류애의 최소점이다. 제네바 협약은 4개의 협약이 엮인 독특한 형태다.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건 전쟁 포화 속 인류애의 최소점을 조금씩 올려 왔기 때문이다. 1864년 육지전 중 다친 병사에 대한 처우 규정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 해전 중 다친 병사에 대한 처우(1907년), 전쟁 포로(1929), 전시 민간인에 대한 처우(1949)로 확장됐다.

제네바 협약은 적십자의 탄생과 궤를 같이한다. 적십자의 창시자이자 1901년 제1회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앙리 뒤낭이 협약을 주도했다. 그는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을 지켜본 뒤 총성이 울리는 상황에서도 인간이 잃어선 안 되는 최소한의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앙리 뒤낭은“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며 “돈보다 죽어가는 이들을 돕는 게 훨씬 더 중요한 가치”라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190개국 이상이 제네바 협약을 비준했다. 북한도 4가지 협약 모두를 비준한 국가 중 하나다.

지난 22일 발생한 북한의 공무원 이모(47)씨 총살 사건은 명백한 제네바 협약 위반이다. 시민단체 군인권센터는 25일 성명서를 내고 “북한이 민간인의 보호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제네바협약(제4협약)을 위반했다”고 비판했다. 제네바 제4협약 130조에 따르면 억류 중인 민간인이 사망하더라도 위생상 절대로 필요한 경우, 사망자의 종교와 희망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면 화장해선 안되고 정중히 매장해야 한다.

156년 전 앙리 뒤낭이 목소리를 높인 최소한의 인류애는 2020년 대한민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북한이 월북자를 화장했다”(김어준)는 말은 서울시 산하 공영방송의 라디오 전파를 탔다. 한 방송사의 북한 전문기자는 “공무원 사살은 북한군에 내려진 코로나 비상방역 조치로 분석된다”고 적었다. 김정은의 사과문을 놓고 “계몽군주(유시민)”란 표현까지 등장했다.

“전쟁과 정치가 인간을 뛰어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앙리 뒤낭의 말을 보고 있자니 씁쓸한 기분만 가득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사람이 먼저”라던 문재인 대통령의 초심은 어디에 버려진 걸까. 이씨의 명복을 빈다.

강기헌 산업1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