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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문재인 대통령이 침묵할 때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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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으뜸가는 국가의 존립 이유이자 대통령의 기본 책무다. 대한민국 국민이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건 국가와 대통령의 책무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금의 사태는 그런 믿음의 기반을 허물고 있다. 개성공단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파괴는 국민의 재산을 지키지 못한 사건이었다.

대화 실마리 잡은 양 공동조사 요청 반복 #국민에 해명하고 단호한 입장 천명해야

그런데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과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국민의 생명이 서해 찬 바다에서 스러져갔다. 그것도 봉건시대에나 있었음직한 극도의 잔인무도한 방법이 동원됐다. 그러나 대통령의 단호한 결의 표명은 없었다. 대신 정부는 대남 공작 부서인 북한 통일전선부가 전한 김정은의 “미안하다”는 말에 남북대화의 실마리라도 잡은 양 반색하며 공동조사 요청만 공허하게 반복하고 있다.

공무원 사살 사건은 초동 대응에서 사후 대처까지의 전 과정에서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의문점을 드러냈다. 이모(47)씨 사살을 파악한 이후에도 이튿날 아침까지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청와대의 해명부터 귀를 의심케 한다. 대통령비서실장과 안보실장, 관련 부처 장관들이 새벽 1시에 청와대에서 긴급 대책회의를 한 것은 비상사태란 판단을 했다는 의미다. 국군통수권자이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의장인 대통령은 이를 몰랐다고 한다. 대한민국 안보가 이렇게 허술한 시스템 아래 놓여 있단 말인가. 오로지 대통령의 안면(安眠)만을 걱정하는 청와대 참모와 안보부처 장관들을 어떻게 믿고 국민이 밤잠을 이루겠는가. 북한이 얕잡아 보고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될 ‘사건’이다. 피격 첩보 이후 ‘문 대통령의 10시간’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남북 정상 간 친서 라인이 가동되고 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만일 핫라인을 통해 진위를 확인하는 시늉이라도 했더라면 북한군 ‘상부’가 함부로 살해 명령을 내리진 못했을 것이다. 전화 한 통화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는데도 골든타임을 그냥 흘려보냈다. 이씨가 북한군에 발각된 순간부터 사살당하기까지 ‘골든타임 6시간’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대통령이 보인 태도에도 실망을 금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의 반응은 얼굴 없는 ‘청와대 관계자’를 통해 ‘강한 유감’을 전한 게 전부였다. 2017년 낚싯배 전복 사고 때 공개석상에서 묵념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대통령이 이번에는 말이 없다. 국군의날 기념사에서도 ‘총살’은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에 김정은의 통지문은 서훈 안보실장에게 전문을 다 읽게 했다.

남북관계를 포함한 외교안보 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국민의 생명 안전을 지키기 위함이다. 지금은 대통령이 침묵할 때가 아니다. 국민 앞에서 단호한 대응 의지를 밝히는 것이 우선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어떻게 벌어졌고, 그사이 청와대의 판단과 대응은 어땠는지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