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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곰처럼 겨울잠 잔 러시아 프스코프 지방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강정영의 이웃집 부자이야기(61)

유난히 긴 장마 끝에 가을이 다가온다. 아침저녁 공기가 서늘하고 삽상하다. 머지않아 나뭇잎이 오색으로 변하고, 숲속은 머루, 다래, 라즈베리, 블루베리 등등 각종 열매가 익어 새와 들짐승이 가을 잔치를 벌일 것이다. 이 좋은 계절,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리는 동물이 있다. 곰이다. 겨울잠 준비를 위해 가을은 곰에게 매우 소중하다. 하루 40kg 정도 먹어 배를 채우고, 체중을 두 배로 불린다.

알래스카는 곰이 연어를 잡는 풍경을 즐겨 볼 수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알류샨열도와 러시안 리버가 대표적이다. 강 이름은 알래스카가 한때 러시아 땅이었음을 알려준다. 연어가 많이 몰려와 불곰이 자주 찾는 강이다. 수년 전 그 강에 갔을 때, 불곰이 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한참 연어를 잡고 있었다. 어미 불곰은 능숙하게 연어를 잡아 배를 채운 뒤 강둑으로 올라가 쉰다. 그러나 새끼 곰은 ‘물 반 연어 반’인데도 불구하고 발바닥으로 허둥지둥 강물을 튕기기만 하지 소득은 없다. 이삼십 분간 연어잡이를 시도하다가 허탕을 치고, 강둑 어미 곁으로 돌아간다. 놀라운 것은 어미가 새끼의 소득 없는 연어잡이를 계속 지켜보면서 강둑에서 기다려주는 모습이었다.

알래스카는 곰이 연어를 잡는 풍경을 즐겨 볼 수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알류샨 열도와 러시안 리버가 대표적이다. 강 이름은 알래스카가 한때 러시아 땅이었음을 알려준다. [사진 pxhere]

알래스카는 곰이 연어를 잡는 풍경을 즐겨 볼 수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알류샨 열도와 러시안 리버가 대표적이다. 강 이름은 알래스카가 한때 러시아 땅이었음을 알려준다. [사진 pxhere]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 갈 때의 풍경이었다. 사람들에게는 구경거리였지만, 곰에게는 기나긴 겨울잠을 위해 먹이를 비축해야 하는 일분일초가 아까운 ‘귀한 가을날’이었을 것이다. 곰의 겨울잠은 혹독한 추위를 피해 에너지 소모를 방지하고, 안전하게 겨울을 나기 위한 방편이다. 사람도 일 년 내내 일만 하는 대신 곰처럼 겨울잠을 자며 얼마 동안 쉬어 보면 어떨까. 불가능할까.

식량이 귀하고 기근이 일상이었던 러시아의 북동 프스코프 지방에서 오랫동안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가을 추수를 끝낸 농부가 식량도 아끼고 혹한을 피하기 위해 긴 겨울을 곰이 겨울잠을 자듯이 보낸다고 한다. 첫눈이 내리면 가족들이 모여 방 한가운데 스토브를 중심으로 드러눕는다. 그리고는 생존에 필요한 일상의 잡다한 일을 올스톱하고 조용히 잠에 빠져든다.

하루에 한 번 일어나 빵 한 조각으로 허기를 때운다.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은 돌아가면서 스토브의 불을 꺼지지 않게 보살핀다. 긴 겨울이 끝나고 풀이 돋기 시작하면 다시 깨어나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모든 생명이 시들어 사라지면 겨울잠을 청한다. 이를 러시아에서는 ‘로츠카’라 하는데,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을 따르는 삶의 방식을 뜻한다. 그곳에는 치열하고 숨 가쁜 생존경쟁은 없었다.

생존을 위해 겪어야 하는 수많은 근심 걱정과 짐을 벗어 던지고, 사실상 정신적인 ‘열반(Nirvana)’에 드는 것이다. “오 행복하고 또 행복한 땅의 주인이여,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살 줄 아는 이여(O fortunatos nimium sua si bona norint, agricolas).” 라틴 경구다.

겨울이 긴 프랑스의 알프스와 피레네 산악 지방에서도 비슷한 겨울나기 풍습이 있었다. 혹독한 겨울이 닥치면 하던 일을 중단하고 스스로 문을 닫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다. 지하에 땅을 파거나 동굴 속에서 추운 겨울을 넘겼다. 그들은 1년을 “7개월의 겨울, 5개월의 지옥”으로 불렀다. 일을 해야 하는 5개월을 지옥에 비유했다. 당시 평균 수명이 30대 중반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궁핍 속에 살아 겨울잠은 차라리 안식이었다.

극단적인 겨울잠은 아닐지라도, ‘산속의 자연인’처럼, 잠시 혼잡한 일상을 떠나보면 어떨까. 한적한 시골 마을이나 산자락에서 한철을 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멈추고, ‘한동안의 은둔’ 어떤가.[사진 pixnio]

극단적인 겨울잠은 아닐지라도, ‘산속의 자연인’처럼, 잠시 혼잡한 일상을 떠나보면 어떨까. 한적한 시골 마을이나 산자락에서 한철을 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멈추고, ‘한동안의 은둔’ 어떤가.[사진 pixnio]

현대를 살아가기 위해,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혹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일이 너무 과도하거나 일은 하고 싶은데 일자리가 없다면? 겨울잠을 자듯, 스스로 사회와 격리시켜 한동안 쉬어보면 어떨까.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세상이다. 코로나로 경험하고 있듯이 생존을 위협하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심심찮게 발생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극단적인 겨울잠은 아닐지라도, ‘산속의 자연인’처럼, 잠시 혼잡한 일상을 떠나보면 어떨까. 한적한 시골 마을이나 산자락에서 한철을 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멈추고, ‘한동안의 은둔’ 어떤가.

우리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세상만사가 귀찮은 ‘정신적 번아웃’을 때로 경험한다. 그게 오래 지속되면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강한 신호이다. 먹고사는 문제라고 억지로 참고 방치해두면 위험하다. 이런 지경이라면 스스로 안식을 부여하여 ‘곰의 겨울잠’처럼, 일정 기간 ‘일의 공백기’를 가져보는 것도 방법이다.

마치 벼랑 끝으로 내몰린 듯한 압박감. 이런 상황은 회사나 친구, 가족마저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 위기를 넘겨야 한다. 눈 딱 감고, 쉼 없이 달리던 길, 잠시 멈추어 서 보자. 무거운 짐 내려놓고 쉬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면 어떨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쉬는 건 두렵다.

이번 코로나, 한번 지나가고 마는 태풍이 아닌 것 같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다. 적당한 다운사이징이 아니라, 완전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할 것 같다. 적게 일하고, 적게 먹고, 걱정 없이 사는 것도 괜찮은 삶 아닐까. 겨울잠으로 휴식하면서 변화를 모색해보자. 중요한 모멘텀이 될 수 있다. 곰의 겨울잠은 한가한 잠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쉼표이자 지혜이다.

청강투자자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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