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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정부 기간산업안정기금은 ‘아시아나항공’ 몫인가?

중앙일보

입력

대출금리 낮추고 예외 조항 완화 등 ‘코로나19 구제용’ 취지 살려야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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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기간산업안정기금(기안기금)을 통해 아시아나항공에 2조4000억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기안기금이 ‘아시아나항공 지원금’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번 기안기금을 포함해 최근 2년간 아시아나항공에 흘러들어간 지원금은 대한항공 시가총액의 약 2배에 달하는 5조7000억원이다. 아시아나항공을 살리기 위해 혈세가 낭비되고 있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3년간 5조7000억원 투입에 “대한항공 2개 살 돈” 비판 쏟아져

기안기금본부는 지난 9월 11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에서 ‘제15차 기금운용심의회’를 열고 아시아나항공에 2조4000억원을 지원하는 내용의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기간산업안정기금 지원 건’을 의결했다. 세부적으로 시장 안정화 필요 자금 2조1000억원, 유동성 부족 자금 3000억원 등이다. 이는 운영 자금 대출 1조9200억원(80%), 영구전환사채(CB) 인수 4800억원(20%) 등의 방식으로 지원된다. 금융업계와 항공업계에서는 “아시아나항공에 기안기금 수혈은 예견된 일”이라는 평가가 많다. 아시아나항공 매각 실패가 공식적으로 선언돼 이 회사 신용등급이 하락하면 자산유동화증권(ABS) 트리거가 발동돼 수천억원을 조기 상환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리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2분기말 연결기준으로 아시아나항공이 장래 매출 채권을 담보로 발행한 자산유동화사채는 6165억원에 달한다.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가 기안기금 투입을 결정한 후 아시아나항공 매각 실패를 선언한 것은 선(先) 자금지원으로 채권자들의 조기 상환 요구를 억제하려는 의도”라고 했다. 기안기금 측 역시 운영자금 대출과 관련 “인수합병 무산으로 아시아나항공 신용등급이 하락할 경우, 상환 의무가 발생하는 금융 채무(자산유동화증권, 금융리스 등)의 상환 대비용 자금”이라며 “기안기금 지원으로 아시아나항공 신용등급이 유지되면 대출 규모는 크게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입장이다.

“기안기금 최대 수혜자는 아시아나항공”

자료: 기획재정부

자료: 기획재정부

아시아나항공이 기안기금 1호 지원 기업이 되자 “기안기금 최대 수혜자는 아시아나항공”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아시아나항공 지원 규모를 두고 “코로나19로 발생한 피해를 넘어 아시아나항공에 누적된 피해를 전부 지원하는 규모”라는 얘기도 나온다. 정부가 아시아나항공의 누적 손실을 몽땅 지원하는 것은 코로나19 피해 기업을 지원하는 기안기금의 취지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아시아나항공을 살리기 위해 대한항공 규모의 항공사 2곳을 살 수 있는 금액을 쏟아 붓는 것은 과도한 혈세 낭비”라는 원색적인 비난도 나온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은 이미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총 3조3000억원의 자금을 아시아나항공에 지원한 상태다. 기안기금까지 합치면 모두 5조7000억원이 아시아나항공에 투입되는 셈이다. 이는 대한항공 시가총액(약 3조3000억원)의 1.7배 수준이다. 아시아나항공 시가총액(약 9000억원)과 비교하면 6배가 넘는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기안기금 지원 대상을 근로자수 300인 이상, 총 차입금 5000억원 이상의 기업으로 한정하면서 일부 국적 저비용항공사(LCC)들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며 “벼랑 끝 위기에 내몰린 LCC발(發) 대규모 실직 사태가 우려되는 상황인 만큼, 고용 안정 등을 위해 운용되는 기안기금의 취지에 맞게 지원 대상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 제주항공의 인수 포기로 공중분해 위기에 내몰린 이스타항공은 직원 600여명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또 다른 국적 LCC인 티웨이항공은 지난 7월에 5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추진했으나, 최대주주인 티웨이홀딩스의 청약 참여율이 저조해 유상증자를 중단하기도 했다. 2분기말 연결기준으로 티웨이항공의 현금 및 현금성자산은 588억원에 불과한 반면, 만기가 3개월 미만인 금융부채는 774억원에 달한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티웨이항공의 현금이 바닥난 상태인 것으로 안다”며 “이스타항공뿐만 아니라 티웨이항공도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다. 정부는 LCC에 대한 추가자금 지원을 검토하고 있으나, 기안기금 지원 대상은 아니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당초 기안기금 1호 지원 기업으로 거론됐던 대한항공의 경우 유상증자와 자산 매각 등을 통한 자체 자금 조달에 힘을 쏟고 있다. 대한항공은 지난 7월 유상증자를 통해 1조원 이상의 자금을 마련했고, 지난 8월에는 사모펀드인 한앤컴퍼니에 기내식기판사업을 9906억원에 매각했다. 이 외에도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 왕산레저개발 지분 등 회사 소유자산 매각을 추진 중이다. 대한항공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대한항공이 현재로서는 기안기금 신청을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며 “기안기금 내부에서도 대한항공의 기금 신청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기안기금 지원 조건 까다로워 기업들 ‘난색’

항공과 해운 등 기안기금 지원 대상 기업들 사이에선 지원 조건이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는 지원 조건으로 고용안정, 경영개선, 이익공유, 도덕적해이방지 등의 단서를 달았다. 이들 조건 중 대출금리와 관련해 ‘시중금리 플러스알파’ 수준으로 설정한다고도 했다. 기안기금 대상 기업의 한 관계자는 “아시아나항공과 달리 자산 매각 등을 통해 자금 동원 여력이 있는 기업 입장에선 무리하게 시중보다 높은 금리로 대출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시중금리 플러스알파라고만 밝힌 상태라, 실제 어느 정도로 금리가 적용될 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구체적인 금리가 제시되자 않아 기안기금을 신청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아시아나항공의 기금 투입 사례를 참고해 기안기금 신청을 검토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식 연계 증권 취득 조건도 기안기금 신청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는 기금 지원 이후 이익공유 차원에서 지원 총액의 최소 10%를 전환사채, 신주인수권부사채 등 주식 연계 증권을 취득하는 형태로 지원한다. 지원금 10% 규모의 기업 지분이 정부에 귀속되는 것이다. 정부는 자금 지원으로 보유하게 되는 기업의 의결권 있는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자금 지원 조건을 현저하게 위반해 자금 회수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에는 의결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예외 조항을 남겨뒀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대한항공이 현재 경영권 분쟁에 휘말린 상태라, 의결권 행사 예외 조항에 대해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예외 조항에 근거하면 향후 정부의 입맛에 따라 의결권 행사가 가능해 최악의 경우 경영권 방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지난해 3월 국민연금의 반대로 당시 대한항공 사내 이사였던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전 회장이 연임에 실패했던 경험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교수(경영학)는 “기안기금은 코로나19로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기업을 지원하는 일종의 구제 금융인데, 정부가 리스크를 모두 반영해 시중금리보다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것은 기안기금을 통해 수익을 내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라며 “기안기금 취지에 맞게 대출금리를 낮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또 “정부가 대출금리나 10%의 주식 연계 증권 취득 등에 대한 명확한 세부 조건을 제시하고 예외 조항을 완화하는 등 기안기금의 문턱을 낮출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산은-아시아나는 밀월 관계” 비판도

일각에선 기안기금의 지원 대상, 지원 조건 등을 감안하면 애당초 아시아나항공에 최적화된 기금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아시아나항공은 자회사 매각 등의 초강수를 두지 않는 한 자금 마련이 쉽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시아나항공 안팎에서도 자회사 매각보단 노선 감축 등의 구조조정을 먼저 검토하겠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자산 매각 등으로 자금 확보 여력이 있는 기업들은 당장 기안기금을 신청하지 않아도 되지만, 아시아나항공 입장에선 시중금리보다 높은 금리의 기안기금을 마다할 처지가 아니라는 얘기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아시아나항공은 기안기금이 아니면 현재로선 유동성 위기를 극복할 방안이 없어 보인다”고 전했다.

기금운용심의위원들도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기안기금 지원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산업은행은 “기안운용심의위원들은 코로나19 장기화 상황에서 만약 아시아나항공의 인수합병이 무산된다면, 대규모 실업 사태뿐 아니라 국내 항공 산업의 경쟁력이 크게 약화되는 등 국가 경제적으로 막대한 손실이 예상됐기 때문에 그간 심도 있는 논의 과정을 거쳐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기안기금 지원을 결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기금운용심의회는 지난 7월부터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기안기금 지원 등을 검토해왔다.

산업은행과 금호그룹 등이 매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매각 실패로 발생한 피해를 정부 자금으로 보전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아시아나항공 인수합병 무산으로 매각 대금을 받지 못한 금호고속에 대한 지원이 대표적이다. 최대현 산업은행 부행장은 지난 9월 11일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금호그룹 최상단에 있는 금호고속은 9월 말까지 1100억원, 연말까지 4000억원의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우선 1200억원을 지원하고 나머지 2800억원은 정밀 실사를 통해 검증한 후에 관리 및 처리 방안을 결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금호고속을 채권단 관리 체제로 전환해 자금 지원을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금호그룹의 금호타이어 인수 실패 등을 근거로 산은과 금호그룹의 악연을 얘기하는데, 현 상황만 놓고 보면 악연이 아닌 밀월 관계처럼 보인다”고 꼬집었다. 사실상 ‘공동 운명체’에 가깝다는 얘기다.

이창훈 기자 lee.changh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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