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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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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5호 21면

양심이란 무엇인가

양심이란 무엇인가

양심이란 무엇인가
마틴 반 크레벨드 지음
김희상 옮김
니케북스

현대는 양심 과잉 아니면 부족 #나치 역사 등 살펴 원인 추적

“나는 누군가에게 충분히 공정하지 못했다고 느낄 때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나는 반대파를 박해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왔다.” “정치적 논란 때문에 누군가를 암살하는 일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도덕주의자의 어록인가 싶지만 사실은 아돌프 히틀러가 1941~44년 비밀사령부에서 측근이나 손님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600만 유대인을 포함해 포로·슬라브족·집시·장애인·동성애자·정치범 등 1100만을 학살한 독재자의 발언이라고 믿기 힘들다.

도대체 양심이 뭐기에 살육을 저지르고도 태연히 “나는 양심적이다”라고 우기는 것일까. 네덜란드 출신으로 이스라엘 히브리대 교수인 지은이는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역사에서 양심의 본질을 파고든다. 이를 통해 현시대에 왜 양심 과잉과 부족이 동시에 나타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간다.

지은이는 나치 시절 친위대(SS)와 게슈타포(비밀경찰)를 앞세워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하인리히 힘러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힘러는 ‘안슈탠디히카이트(Anständigkeit)’를 자주 입에 올렸으며 부하들에게 이를 실행하라고 지시했다. 지은이는 흔히 ‘예의 바름’ ‘단정함’으로 번역되는 이 말이 품위·충성·정직·진실을 합친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군말하지 않고 지시대로 움직여야 품위와 충성심을 지킬 수 있다는 전체주의·획일주의 논리를 반영한다. 이런 체제에 매몰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양심에 대한 판단력을 잃게 된다.

양심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지난 1월 아우슈비츠 해방 75주년 기념식에서 눈물짓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양심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지난 1월 아우슈비츠 해방 75주년 기념식에서 눈물짓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집단주의 세뇌를 주도했던 나치 대중계몽·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내 양심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지은이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명령에 따라 움직였거나, 모든 책임을 히틀러에게 넘긴 것”이라고 평가했다. 자신의 원칙이나 철학을 바탕으로 무엇이 옳은지, 정의로운지, 공정한지를 고민하고 판단하지 않고 지시나 군중심리를 따른 데서 문제가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지도자와 지지자에게 양심이란 개인과 자기편의 이익을 달리 표현한 수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지도부가 아닌 현장 집행자들은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했을까? 지은이는 노스캐롤라이나대 역사학 석좌교수인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이 이를 연구한 결과인 『평범한 사람들(92년)』을 인용한다. 브라우닝은 나치 학살부대인 질서경찰 산하 101 예비대대 생존자들을 심문한 기록을 분석했다. 그 결과 유감이나 후회를 말한 사람은 없었고 양심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악의 평범함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들과 반대로 행동한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를 살피면 시야가 더 넓어진다. 예루살렘의 ‘야드 바솀(홀로코스트 박물관)’은 63년부터 유대인 구조에 몸 바친 ‘카시드우모트하울람(열방의 의인들)’을 찾아 2만 4000명을 명단에 올렸다. 지은이는 이들의 대부분처럼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옳고 그름만 바탕으로 하는 행동,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바른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양심적이라고 결론짓는다.

지은이는 “도덕은 선악을 구분하는 능력이며, 양심은 도덕을 바탕으로 우리가 처신하고 행동하게 한다”며 “양심과 도덕을 혼동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양심은 악한 행동을 막아주는 것은 물론 이를 저지른 다음에 죄의식을 느끼고 후회하게도 해준다. 양심이 타고난 것이든, 습득된 것이든 인간 영혼의 일부분인 이유다. 18세기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했던 “양심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선과 악을 바탕으로 우리가 그래야 마땅하다고 믿는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라는 말이 오늘날에도 울림을 준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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