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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세계 경제 전망

슘페터가 말한 것처럼 혁신 없이 불황 탈출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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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아베노믹스 닮아 가는 세계 경제 흐름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아베 신조는 일본 현대사에 오래 기억될 인물이다. 일본 총리 중 연속으로 7년 8개월에 이르는 최장수 재임 기록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글로벌 경제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거대한 경제실험을 지휘했다. 이 거대한 실험은 처음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고, 아베가 총리에서 물러나면서 실패라는 판정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실험은 지금 저성장과 불황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전 세계 주요국에 살아 있는 교훈을 주고 있다. 전 세계의 ‘일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코로나19 사태까지 덮치면서 세계 각국이 동원하는 정책이 아베노믹스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8년에 걸친 거대 경제실험 실패 #금융과 재정으로는 반짝 효과뿐 #세계 각국 아베노믹스 따르지만 #기술혁신 없으면 결국 효과 없어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이 실험은 2012년 12월부터 2020년 9월까지 거의 8년에 걸쳐 진행됐다. 장기 실험이었던 만큼 성과의 객관화도 충분히 가능하다. 더구나 실험에는 모두 세 개의 화살로 불리는 세 개의 독립변수가 투입돼 평가가 용이한 편이다. 차례로 ▶확장적 재정 ▶충분한 금융완화 ▶성장전략이다. 일본은 이렇게 재정과 금융이라는 두 개의 화살을 활용해 시중에 돈이 철철 넘치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자국 통화가치를 많이 떨어뜨리는 데 성공한 일본은 수출 경쟁력을 크게 회복했다.

세 번째 화살은 성장전략이다. 법인세를 크게 낮추는 데서 출발해 기업 투자 활성화를 위해 규제 완화에도 나섰다. 나아가 여성의 사회 진출을 활성화해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인적자원 부족 해소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일본은 상당한 활력을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구인배율이 1.6~1.7에 이를 만큼 기업 활력이 되살아나 대졸자는 졸업도 하기 전에 직장을 골라서 취업할 수 있었다. ‘잃어버린 20년’이 본격화했던 2000년대 일본 청년들이 취업하지 못해 후리타(비정규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던 때와 사뭇 달랐다.

8년간 중국과 GDP 격차 더 벌어져

하지만 경제 전체로 보면 일본은 지난 8년간 오히려 뒤로 밀려났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의 격차도 더 벌어졌다. 국내총생산(GDP) 규모에서 미국이 2012년 16조1970억 달러에서 2019년 21조4390억 달러로 30% 성장했고, 중국은 같은 기간 8조5700억 달러에서 14조1400억 달러로 70% 가까이 늘어났다. 그 사이 일본의 GDP는 6조2030억 달러에서 5조1540억 달러로 오히려 20%가량 줄어들었다. 거품경제 절정기였던 1980년대 한때 미국을 넘봤던 일본 경제는 아베노믹스에도 불구하고 왜소증에 걸린 것처럼 위축되고 있다는 얘기다.

아베노믹스 8년간 중국과의 격차 더 벌어져

아베노믹스 8년간 중국과의 격차 더 벌어져

여기서 아베노믹스의 결정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거대한 인구를 기반으로 고속성장에 올라탄 중국과의 격차는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문제는 오히려 경제 규모가 쪼그라들었다는 사실이다. 표면적으로는 엔화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이 늘고 주요 일본 기업들의 활력도 살아나 고용이 늘었다. 특히 선진국 중 취업률이 가장 낮았던 여성의 사회 진출이 크게 늘어난 것은 경제 체질의 긍정적 변화로 평가될만한 성과였다. 엔화 가치가 2012년 말 달러당 80엔에서 105엔 수준으로 하락(환율 상승)한 것은 일본 기업으로선 날개를 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냉혹한 국제경쟁에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조지프 슘페터가 강조한 파괴적 혁신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세 번째 화살이었던 성장전략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법인세를 낮추고 무공해 미래 산업이라면서 관광 규제를 풀어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크게 확대했지만, 세계적 전환기 때마다 나타나는 기술혁신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성장전략의 실현을 위해서는 과감한 구조개혁이 있어야 했지만, 아베 총리는 오히려 기업의 고용안정을 유지하도록 했고, 여기서 패착이 있었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

지금 돌아보면 결국 재정을 풀고 시중에 돈이 넘치도록 금리를 낮추는 수준의 케인스주의 정책수단으로는 경제를 살리지도 키우지도 못한다는 교훈을 남긴 셈이다. 아베가 거의 1세기 전 대공황 때 쓰던 이런 수준에서 정책 변죽을 울리는 동안 세계는 4차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중국은 아예 3차 산업시대의 부진을 만회하고 모바일시대로 건너뛰면서 알리바바·텐센트·화웨이·바이트댄스 같은 테크 기업을 창출하면서 미국을 위협할 만큼 성장했다.

지금 일본에는 글로벌 시장에서 테크기업이라고 불릴 만한 기업이 사실상 제로(0) 상태다. 자라나서 테크기업으로 올라갈 유니콘 기업도 미국과 중국은 100개를 넘기며 각축을 벌이고 있지만, 일본은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 소프트뱅크가 영국에서 성장한 반도체 설계회사 ARM을 인수했지만, 다시 내놓기로 한 것도 일본의 암울한 현실을 반영한다. 미국은 언제든 파괴적 혁신이 가능한 벤처기업 환경이 조성돼 있어 테크기업이 속출하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그럴만한 비즈니스 환경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테크기업이 등장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혁신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헬리콥터 머니 살포는 재정 낭비뿐

이런 점을 두루 돌아보면 아베노믹스는 코로나는 물론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만성적인 경기침체를 겪고 있던 글로벌 경제에 귀중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급한 불을 꺼야겠지만 지금처럼 재정과 금융을 통한 헬리콥터 머니 살포는 경제활력을 되찾고 궁극적으로 체질을 바꾸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주요국은 지금 재정과 금융을 거의 무제한 확장하고 있다. 세계 금융의 심장인 미 연방준비제도(Fed)조차 코로나 사태 대응을 위해 최대한 저금리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초저금리가 경제 회복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비단 일본뿐 아니라 마이너스 금리를 채택해 온 유럽중앙은행(ECB)·스웨덴·덴마크·스위스를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스웨덴은 지난해 말 마이너스 금리를 포기했다. 처음에는 경기 회복에 도움이 되는가 싶었지만 결국 집값 폭등과 재정 악화라는 부작용이 심해지면서 되레 경제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에서도 재정 확장과 초저금리 정책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적이 없다. 일본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물가상승률을 2%로 끌어올려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물가는 코로나19 전에도 1%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FT는 “스가 요시히데 신임 총리가 행정 및 구조개혁에 우선순위를 두겠다고 했지만, 확실한 메시지와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면 아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비춰 보면 한국의 미래도 밝지 않다. 천문학적 재정 투입으로 국가채무가 급증하고 있지만, 규제 개혁과 혁신이 지체되면서 성장동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내년에는 재정만 낭비하는 공공일자리가 103만개에 달하고 소비쿠폰을 받는 국민도 2300만명에 달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던 아베노믹스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는 형국이다.

일본 경제 쇠락, 강 건너 불 아니다

일본은 아베노믹스로 잃어버린 세월을 결과적으로 추가하게 됐다. 혁신과 노동 개혁 등 과감한 구조개혁으로 경제체질을 바꾸지 못하는 바람에 글로벌 경제의 각축전에 끼이지 못하게 되면서다. 더 큰 문제는 경로 의존성이다. 이미 일본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할 만큼 재정 확장과 금융 완화를 극대화하고 있다. 다시 되돌리면 엔고(高)로 회귀해 일본 기업의 수출경쟁력이 약화한다.

더구나 정치 불안도 일본 경제 활성화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아베가 장기 재임하는 8년 동안 일본 정치권 특유의 파벌 정치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정책을 이끌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파벌 정치가 고개를 들면 2000년대처럼 1년도 채 안 돼 총리가 수시로 교체되는 정치 불안이 재연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국가부채도 불안요인이다. 일본은 소비세를 올려 부채를 줄이려고 했지만 지난해 10월 10%로 인상하자 일본 경제는 급격히 위축됐다. 소비세 인상은 늘어난 세금으로 정부 지출을 확대해 경기를 자극한다는 구상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경제회복의 발목만 잡은 셈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아베의 후임자 스가 요시히데는 코로나와도 싸우게 되면서 더욱 힘든 상황을 맞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저출산·고령화와 함께 성장률이 둔화하고 국가부채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한국에 아베노믹스의 좌절과 일본의 끝없는 쇠퇴는 강 건너 불이 아닌 것 같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