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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불탔는데 국민은 언론보고 알았다…논란의 '文 10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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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후 청와대에서 제75차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영상으로 전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후 청와대에서 제75차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영상으로 전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북한에서 발견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47)씨를 사살한 뒤 시신을 훼손한 북한의 도발과 관련, 지난 23일 새벽 심야 관계장관회의가 소집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약 10시간 동안 문재인 대통령에겐 관련 내용이 보고되지 않았다는 청와대의 발표가 논란을 낳고 있다.

청와대 “22일 밤 10시30분 첩보 #대통령에겐 23일 오전 대면 보고” #북 도발 뒤 종전선언 연설 나가 논란 #문 대통령 “충격적 사건, 용납 안돼”

24일 낮 12시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 직후 브리핑에서 서주석 NSC 사무처장은 “북한군이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저항할 의사도 없는 우리 국민을 총으로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북한은 반인륜적 행위에 사과하고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한 분명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북한은 이씨 실종 하루 뒤인 22일 오후 3시30분 등산곶 일대 해상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부유물에 의지해 표류하던 이씨를 발견했고, 밤 9시40분 사살한 뒤 10시10분쯤 해상에 그대로 둔 채 기름을 뿌려 시신을 불태웠다. 군은 이 과정을 파악한 뒤 같은 날 밤 11시쯤 서욱 국방부 장관과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에 동시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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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청와대는 ‘관련 첩보’가 우리 군 당국에 입수된 시간을 22일 밤 10시30분으로 특정했지만, 문 대통령이 해당 내용을 보고받은 시간은 그로부터 10시간이 지난 23일 오전 8시30분이었다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보고 시점과 관련해 “22일 오후 6시36분 서해 어업관리단 직원이 해상에서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고가 발생해 수색에 들어갔고, 북측이 실종자를 발견했다는 첩보를 대통령에게 첫 서면 보고했다”고 했다. 하지만 당일 밤 입수한 사살과 시신 훼손 관련 첩보는 “23일 오전 8시30분부터 9시까지 안보실장(서훈)과 대통령비서실장(노영민)이 대면 보고를 했다”고 발표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이 대면 보고 7시간 30분 전인 23일 새벽 1시부터 2시30분까지 첩보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한 관계장관 회의가 장관급만 5명이 참석해 청와대에서 열렸다. 민감하고 중요한 메가톤급 안보 사안에 관한 내용을 군 통수권자인 문 대통령만 23일 아침까지 몰랐고, 관계장관 회의가 열렸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는 이야기다.

보고가 늦어진 이유에 대해 청와대는 “22일 밤 첩보는 말 그대로 첩보 단계였기 때문에 대통령에게 보고할 정보 수준이 되지 못했다”며 “밤새 확인을 거쳐 아침에 즉각 보고가 이뤄진 것은 신속한 의사결정 과정”이라고 해명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23일과 24일 “첩보가 사실로 밝혀지면 국민이 분노할 일이다. 사실관계를 파악해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알리라”는 취지로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은 북한의 도발 사실을 23일 밤 이후 언론 보도를 통해 처음 접했다.

청와대서 23일 새벽 관계장관 회의, 문 대통령은 회의 열린 것도 몰라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발신한 메시지 역시 현실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23일 새벽 관계장관회의가 열렸던 오전 1시26분부터 42분까지 문 대통령은 유엔총회 영상 연설에서 “한국전 발발 70주년인 올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완전히, 영구적으로 끝내야 한다”며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15일에 녹화해 18일 유엔에 보냈다는 영상 연설은 원고 수정 없이 그대로 진행됐다. 청와대는 “첩보만으로 연설을 취소하거나 수정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했지만 야당에선 “피살 사태가 유엔 연설 이전에 즉각 보고되지 않았다면 군과 정보기관의 직무 태만이며, 아니라면 유엔 연설을 의식한 고의 지연”(김은혜 국민의힘 대변인)이라고 지적한다.

문 대통령은 첩보를 보고받은 뒤인 23일 오후 군 장성 진급 및 보직 신고식에서도 관련 내용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평화의 시대는 일직선으로 곧장 나 있는 길이 아니다. 진전이 있다가 때로는 후퇴도 있고, 때로는 멈추기도 하며, 때로는 길이 막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이 공식화된 24일 오후 경기도 김포의 온라인 공연장 ‘캠프원’에서 열린 문화콘텐트산업 전략 보고회에도 예정대로 참석했다. 보고회에선 실감 오디오 콘텐트를 체험하는 아카펠라 공연까지 그대로 진행됐다. 이 행사를 마친 문 대통령이 강민석 대변인을 통해 “충격적인 사건으로 매우 유감스럽다.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북한 당국은 책임있는 답변과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공식 메시지를 내놓은 건 청와대가 이씨 사망 첩보를 입수한 지 43시간 만이었다.

이날 청와대 관계자는 유엔 연설의 종전선언 제안에 대해 “‘사고’가 있었지만 남북관계는 지속되고 견지돼야 하는 관계”라고 말했다가 기자들의 지적에 “그냥 사고가 아니고 반인륜적인 행위가 있었다”고 정정했다.

강태화·윤성민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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