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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대기자의 퍼스펙티브

한국 삶의 질 수준, 미국·프랑스보다 높다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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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사회발전지수(SPI)로 본 한국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주 미국 워싱턴 소재 비영리 기관인 소셜 프로그레스 임페러티브(Social Progress Imperative)가 2020년 사회발전지수(SPI) 보고서를 발표했다. 각국의 사회발전 수준을 보여줄 수 있는 50개 지표를 조사 분석해 100점 만점 기준으로 평가한 보고서다. 각국의 ‘삶의 질’을 나타내는 종합성적표라는 게 소셜 프로그레스 임페러티브 측 설명이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인 딜로이트가 파트너로 참여하고, 시스코와 록펠러 재단이 후원해 2014년부터 매년 발표하고 있다.

100점 만점에 89점으로 세계 17위 #정보통신·교육·안전은 최고 수준 #환경·포용성은 미흡, 개선 노력 필요 #체감 현실과 괴리 탓 반응 엇갈려

‘50-30 클럽’ 7개국 중 독일·일본 다음

2020년 사회발전지수 보고서 표지. 노르웨이·덴마크·핀란드 등 인구 1000만 명 이하의 북유럽 국가들이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사진 소셜 프로그레스 임페러티브]

2020년 사회발전지수 보고서 표지. 노르웨이·덴마크·핀란드 등 인구 1000만 명 이하의 북유럽 국가들이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사진 소셜 프로그레스 임페러티브]

2020년 SPI 조사에서 한국이 받은 점수는 89.06점. 조사대상 163개국 중 17위에 해당한다. 2014년 28위였던 한국은 2016년 26위, 2019년 23위로 꾸준히 오르더니 올해 조사에서는 무려 6단계가 뛰었다. SPI 성적에서 ‘톱10’에 든 나라들은 1위 노르웨이, 2위 덴마크, 3위 핀란드 등 대부분 인구 1000만 명 미만의 북유럽 국가들이다. 인구가 5000만 명이 넘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는 이른바 ‘50-30 클럽’ 7개국만 놓고 보면 한국은 독일과 일본 다음이다. 사회발전 수준에서 한국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미국을 앞질렀다는 얘기다. 자살률과 노인빈곤율은 한국이 세계  최고다. 출산율은 가장 낮다. 청년들은 ‘헬조선’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런 한국의 삶의 질이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들보다 낫다는 조사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마이클 그린 소셜 프로그레스 임페러티브 최고경영자(CEO)는 “국내총생산(GDP)으로 대표되는 경제 발전이 중요하긴 하지만, 강한 경제가 강한 사회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충족하고, 복지의 토대를 마련하고,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개인에게 제공되지 않는다면 경제적 수치에 상관없이 그 사회는 실패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경제 지표와 무관하게 한 사회의 진정한 성공과 실패를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SPI라는 것이다. 지수 개발에는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비즈니스 스쿨 교수와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여러 명의 학자가 참여했다.

SPI는 인간의 기본 욕구 충족 정도를 보여주는 4개 항목과 복지의 토대 구축 정도를 나타내는 4개 항목, 개인에게 제공되는 기회의 폭을 보여주는 4개 항목 등 총 12개 항목으로 구성된다. 또 각 항목은 3~5개의 세부 지표로 짜여 있다. 총 50개의 세부 지표에는 그 사회의 발전 수준과 삶의 질을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망라돼 있다는 게 그린의 설명이다.

12개 항목, 50개 지표로 종합 평가

사회발전지수

사회발전지수

예컨대 인간의 기본 욕구 충족 정도를 보여주는 세부 지표는 영양 부족 인구 비율, 5세 이하 성장 지체 아동 비율, 인구 10만 명당 감염병 사망자 수, 불안전한 식수를 사용하는 인구 비율, 조리 시 청정연료 사용 비율,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 수, 인구 10만 명당 살인 사건 사망자 수 등 모두 15가지로 구성된다. 복지의 토대를 나타내는 세부 지표는 25세 인구 중 중등교육 이수 인구 비율, 25~29세 여성 중 무학(無學) 인구 비율, 인터넷 사용 인구 비율, 100명당 모바일폰 가입자 수, 인구 10만 명당 비(非)전염성 질병 사망자 수, 공공의료보험 가입 비율, 인구 10만 명당 온실가스와 미세먼지 배출량, 인구 10만 명당 대기오염 사망자 수 등이 포함된다.

개인에게 제공된 기회를 보여주는 세부 지표로는 전문가 그룹이 평가한 정치적 권리 부여 정도, 표현의 자유 정도, 사법 구제 가능성, 여성의 재산권 행사 정도, 전체 경제활동 인구 중 자영업 종사자 비율, 전문가 그룹이 평가한 부패 수준, 사회경제적 지위나 계층, 성(性)에 따른 정치적 권리의 불평등 정도,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 정도, 3개 세계대학 평가기관 조사에서 상위 400위권에 든 대학 수, 25~29세 여성 중 고등교육 이수 인구 비율 등이 있다. 이들 50개 세부 사항에 대한 SPI 조사를 통해 그 사회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해 향후 정책의 우선순위 결정에 참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인간의 기본 욕구 충족 부문에서 96.92점을 받아 세계 7위를 기록했다. 특히 개인 안전 항목에서는 세계 5위에 올랐다. 복지의 토대 구축 부문(90.12점)은 17위다. 특히 정보와 통신의 접근성 항목은 99.7점으로 단연 세계 1위다. 반면 환경의 질은 80위(79.78점)로 환경 분야에 대한 정책적 고려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의 기회 부문(22위) 경우 고등교육 접근성은 세계 3위로 뛰어나지만, 포용성(39위) 항목은 비슷한 수준의 다른 나라에 비해 뒤처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수긍이 간다” vs “지속가능성 무시”

한국의 사회발전 수준이 50-30 클럽 국가 중 독일과 일본 다음이라는 SPI 조사 결과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각자 느끼는 삶의 질이나 사회적 발전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조사라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느새 부쩍 높아진 우리 사회의 수준을 적절히 반영한 조사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최선의 방법을 동원했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의 평가 결과라는 점이다.

서강대 교수(경제학)와 주영·주미 대사를 거쳐 현재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으로 있는 조윤제 박사는 SPI 조사 결과에 대해 “그다지 놀랍지 않고, 오히려 수긍이 간다”는 반응을 보였다. “해외 어디를 가도 한국만큼 살기 편하고 안전한 나라가 드물고, 의료와 섭생, 교육, 정보통신 등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 아니냐”며 “젊은이들이 느끼는 좌절감은 세계 최고 수준의 학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은 데서 오는 불만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명사적 관점에서 산업혁명의 역사와 패권의 이동을 탐구해온 김태유 서울대 교수(산업공학)는 “이혼 직전의 부부도 스냅샷으로 찍으면 아주 행복해 보이듯이 SPI 조사에서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나온 것은 지속가능성을 무시하고 현상만 봤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겨우 넘은 한국이 삶의 질에서 한국보다 소득 수준이 훨씬 높은 나라들 수준에 근접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심각한 위기의 징후일 수 있다”고 꼬집었다. 한 해 10만 달러를 버는 가장이 가족에게 베푸는 복지의 수준을 3만 달러 버는 가장이 똑같이 베푼다면 그 집 아이들은 장차 대학에 못 간다는 것이다.

세계 평균은 64점, 85점 미국은 28위…코로나 팬데믹으로 미 순위 더 떨어질 듯

조사 대상 163개국의 SPI 평균 점수는 64.24점으로, 2014년 조사 때의 60.63점보다 소폭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전반적인 상승 추세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내려가는 나라도 있다. 미국, 브라질, 헝가리가 대표적이다. 특히 미국은 2014년 16위에서 2016년 19위, 2019년 26위로 계속 떨어지더니 2020년엔 28위로 내려갔다. 50-30 클럽 국가 중 최하위인 것은 물론이고, 에스토니아, 체코, 사이프러스, 그리스만도 못하다.

대학교의 질과 의료 기술 면에서 미국은 세계 1위지만, 양질의 기초교육 접근성은 우즈베키스탄이나 몽골 수준인 세계 91위다. 양질의 의료 접근성은 97위로, 요르단이나 알바니아 수준이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세계 100위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최대 피해국이 미국인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미국의 SPI 성적은 더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2020년 SPI 조사 결과에 대해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미국인들은 스스로 ‘No 1’이라고 말하길 좋아하지만, 실상은 ‘No 28’이고,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경종을 울렸다. 미국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잠에서 깨어날 때라는 것이다.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