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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재정연구원이 얼빠질 이유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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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조현숙 기자 중앙일보 기자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1988년 11월 11일 한국은행 직원 300여 명이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민주정의당 당사로 몰려갔다. 서슬 퍼런 신군부 집권 여당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만큼 한은 직원들을 화나게 한 건 한은법 개정안이었다. 재무부와 한은 간 중앙은행 독립 전쟁의 시작이다.

당시 주요 경제부처 가운데 관할 연구기관이 없던 곳은 재무부뿐이었다. 조세·재정 관련 연구가 필요할 때마다 재무부는 한은 조사부를 활용하면 됐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경제기획원 산하이던 시절이다. 88년과 89년 이어진 갈등에 한은을 더는 활용할 수 없게 되자 재무부 내부에서 산하 독자 연구기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91년 한국조세연구원이 탄생한다. 전 재무부 장관이 초대 원장을 맡았다. 조세재정연구원의 전신이다. 재무부와 한은의 갈등이 없었다면 조세재정연구원 역시 없었거나 창립이 훨씬 늦어졌을 거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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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조세재정연구원이 최근 갈등의 중심에 섰다. 지난 15일 지역화폐의 문제점을 지적한 연구보고서를 발표한 게 발단이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먼저 돌을 던졌다. “얼빠진 연구 결과”(16일), “철밥통”(17일), “사라져야 할 적폐”(18일) 등 비판의 수위는 날이 갈수록 높아갔다. 짐짓 이 지사를 꾸짖는 듯한 다른 여·야 정치인의 발언도 다를 게 없었다. 결론은 ‘지역화폐는 좋다’ 쪽 일변도다. 지역에 기반을 둔 정치인에게 지역화폐는 주민에게 선심 쓰기에 너무 좋은 수단이다. 이 지사가 발끈한 것도, 여·야 막론하고 지원 사격에 나선 것도 사실 제 발이 저려서다.

통화·재정정책에 있어 지역화폐는 더는 ‘찻잔 속 태풍’이 아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지역화폐 남발에 불을 붙였다. 올해만 9조 원어치가 발행됐다. 내년엔 15조원 규모로 늘어난다는 예고(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까지 나왔다. 이번 논란으로 드러났듯 지역화폐는 법적 근거도 모호하고 효과 역시 불분명하다. 제대로 된 연구도 그동안 없다시피 했다.

논란이 고조되는 데도 재정 당국(기획재정부)과 통화 당국(한은) 모두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영역과 권한을 두고 오랜 기간 전쟁을 벌여왔던 두 기관이 이럴 때만큼은 한마음이다. 정치권 눈치보기든, ‘우리 영역이 아니다’란 판단이 자리하든 말이다.

어차피 갈등 속에 탄생한 조세재정연구원이다. 진짜 얼이 빠지게 정치권으로부터 난타당하고 있지만 학자적 양심에 따라 진행한 연구면 문제 될 게 없다. 국가 경제에 이익이냐, 손실이냐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이라면 갈등보다 더 나쁜 게 침묵과 외면이다.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