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한 아파트에서 60대 남성(69)이 함께 화투를 치던 70대 여성 두 명을 흉기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이 60대 남성은 사건 당일인 지난 19일 피해자들을 위협해 경찰에 체포됐다가 풀려난 지 40분 만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뒤늦게 지난 21일 이 남성을 구속했지만 이미 두 명이 생명을 빼앗긴 참극이 벌어진 후다.
23일 아파트 주민들은 "경찰의 소극적인 대처로 비극을 막지 못했다"며 안타까워 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 남성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역설한다. 이 남성이 체포됐을 당시 혐의를 모두 인정한 데다 그의 주거지가 일정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또 목격자 진술과 흉기 등 증거가 확보됐고 피의자 나이가 많고 도주 우려가 적어 구속 사유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형사소송법이 정하는 강제수사법정주의에 따라 원칙대로 대응했다는 설명이다.
피의자 구속은 함부로 할 수 없고 신중해야 한다는 경찰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경찰 대처에 아쉬움이 크다고 지적한다. “가해자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더라도 피해자는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경찰은 피해자 보호에 실패했다”며 “경찰 수사 방식은 2018년 PC방 아르바이트생을 흉기로 찔러죽인 김모씨 사건 때와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60대 남성은 범행 직전 “내가 칼을 들고 있다”며 자신을 경찰에 신고했다. 이는 특수협박 혐의에 해당한다. 특수협박죄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릴 수 있는 무거운 범죄다. 또 그는 폭력 등 여러 범죄 이력이 있는 ‘전과 45범’이었다. 이에 피의자를 무작정 풀어줄 수 없던 경찰은 그를 석방하면서 가족으로 알려진 보증인에게 신원보증서를 받았다. 이 역시 석방 사유로 작용했다.
그러나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신원보증서는 법적 효력도 없고, 형사사법 절차상 편의를 도모하는 것에 불과하다. 신원보증서가 수사 기관이 구속하기 어려운 피의자를 그냥 풀어주기 애매할 때 쓰는 일종의 심리적 안전장치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한 검찰 관계자는 “신원보증서는 수사기관의 면피성 성격이 짙다”고 말했다.
경찰은 당시 구속 사유가 불충분했다고 해명하지만, 피해자 보호조치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무고한 시민이 2명이나 희생됐다. 피해자를 자주 봐왔다는 한 이웃 주민은 “우리 같은 장애인 가족에게도 친절을 베풀었던 이웃”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승 위원은 “가해자를 가둘 수 없었다면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면 됐다”며 “범죄 예방은 국민의 봉사자로서 경찰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말했다.
경찰의 초동 대처가 도마 위에 오르자 김창룡 경찰청장은 “경찰의 조사와 석방 등 조치가 적절했는지 확인한 뒤 결과에 따라 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재발 방지다. 전반적인 수사 시스템이 개선되지 않는 한 비극은 또 발생할지 모른다.
국가수사본부를 신설하는 등 국가 경찰로서 거듭나는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는 경찰은 이번에 기존 수사방식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경찰 시선이 머물러야 할 곳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잘못된 수사 패러다임으로 국민이 피해를 보는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채혜선 사회2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