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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 여성들 '뜨개질 시위'…"반독재' 노벨상 수상자도 나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한 달 반 넘게 이어지고 있다.

루카셴코 독재 정권에 반기 든 여성 운동가들 #여성 시위대 2000명 대선 불복 시위 주도 #노벨문학상 수상자, 노학자 등 지식인들도 나서 #티하놉스카야 "몇 년이라도 시위 계속 할 것"

시위를 이끄는 건 여성들이다. 2000명의 여성 운동가들이 선두에서 행진하며 평화 시위를 이끌고 있다. 일부 여성은 실로 뜨개질을 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평화시위이니 건들지 말라는 경찰을 향한 무언의 메시지다.

지난 13일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열린 대선 불복 시위 현장에 참석한 한 여성 시위자가 흰 옷을 입은 채 경찰들 앞에 서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3일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열린 대선 불복 시위 현장에 참석한 한 여성 시위자가 흰 옷을 입은 채 경찰들 앞에 서있다. [AP=연합뉴스]

독재 정권에 균열 낸 ‘여성 3인방’

벨라루스 대선 전인 지난 7월 17일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가운데), 베로니카 체프칼로(왼쪽), 마리아 콜레스니코바가 수도 민스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벨라루스 대선 전인 지난 7월 17일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가운데), 베로니카 체프칼로(왼쪽), 마리아 콜레스니코바가 수도 민스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가장 눈에 띄는 벨라루스의 여성 운동가는 야권 대선후보였던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다. 21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그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외교위원회에 참석해 벨라루스의 대선 불복 시위를 지원해달라고 호소했다. 타하놉스카야는 “벨라루스 국민은 루카셴코를 합법적인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국제사회가 루카셴코 퇴진 운동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또 대선 불복 시위에 강경진압을 명령한 공직자들을 EU 제재 명단에 포함해달라고 했다.

티하놉스카야는 루카셴코 대통령의 26년 장기 독재에 반기를 든 상징적인 인물이다. 영어 교사였던 그는 남편이 대선 출마 준비 중 체포되자 정권에 반기를 들며 정치에 발을 들였다. 대통령의 연임을 제한하고, 정치범을 석방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지난달 9일 열린 대선에서 루카셴코에 도전장을 냈다. 그러나 80% 이상 득표율을 얻은 루카셴코에 패했다. 티하놉스카야는 즉각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고 대선 불복 시위를 주도했지만 신변의 위협을 받자 리투아니아로 피신했다.

티하놉스카야와 손 잡은 또 다른 여성 콜레스니코바는 강력한 야권 후보였던 빅타르 바바리카 캠프 책임자였다. 지난 7월 바바리카가 루카셴코 정권의 야권 인사 탄압에 휘말려 체포되자 티하놉스카야 선거 캠프에 합류했다.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를 도와 벨라루스 대선 불복 시위를 이끈 마리야 콜레스니코바. [로이터=연합뉴스]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를 도와 벨라루스 대선 불복 시위를 이끈 마리야 콜레스니코바. [로이터=연합뉴스]

콜레스니코바는 지난 7일 수도 민스크에서 괴한에게 납치돼 우크라이나로 강제 출국될 위기도 겪었다. BBC 등에 따르면 콜레스니코바는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여권을 찢은 뒤 자동차 밖으로 던져 위기를 모면했다. 콜레스니코바는 현재 벨라루스에 남아 대선 불복 시위를 이끌고 있다.

티하놉스카야를 돕는 또다른 여성 쳅칼로도 남편을 대신해 정치에 뛰어들었다. 주미 대사를 지낸 남편이 정치적 탄압을 못 이기고 러시아로 떠나자 쳅칼로는 티하놉스카야와 손을 잡고 야권 운동 전면에 섰다.

“왜 침묵하나요?”…여성 지식인들도 한목소리  

티하놉스카야 등 여성 3인방이 루카셴코 대통령의 독재에 균열을 냈다면, 여성 지식인들은 시위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19일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 모인 여성 시위대. 이날 시위에는 여성 시위자 2000명이 참석했다. [EPA=연합뉴스]

19일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 모인 여성 시위대. 이날 시위에는 여성 시위자 2000명이 참석했다. [EPA=연합뉴스]

시위의 중심에는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도 있다. 알렉시예비치는 야권 조직인 ‘조정위원회’ 출신 중 구금되거나 추방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사다. 그만큼 누구보다 앞장서 반정부 시위를 이끌고 있다.

알렉시예비치는 최근 러시아의 동료 작가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시위 지지를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서한에서 “왜 침묵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당신들의 형제입니다”라며 연대를 촉구했다고 한다.

지난 8월 벨라루스 지질학자 니나 바힌스카야(73)가 대선 결과에 불복한다는 의미로 옛 벨라루스 국기를 들고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8월 벨라루스 지질학자 니나 바힌스카야(73)가 대선 결과에 불복한다는 의미로 옛 벨라루스 국기를 들고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9일 벌어진 시위 현장에서는 백발의 지질학자 나나 바긴스카야(73)도 주목받았다. 1980년대부터 민주화 집회에 나섰던 바긴스카야는 이날도 옛 벨라루스 국기를 들고 시위현장 한 가운데 섰다.

바긴스카야는 자신을 강제 연행하려는 경찰을 향해 “뭐가 문제냐”며 쏘아붙이고, 행진 중 “루카셴코는 사이코패스”라고 외치는 등 젊은이 못지않은 '전투력'을 과시했다.

이날 경찰은 시위 현장에서 여성 390여명을 강제 연행했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시위를 예고했다. 티하놉스카야도 EU 연설에서 “필요하다면 몇 주, 몇 달, 몇 년에 걸쳐 시위를 이어갈 것”이라며 굽히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19일 벨라루스 경찰이 민스크에서 열린 대선 불복 시위에 참석한 한 여성 시위자를 강제 연행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19일 벨라루스 경찰이 민스크에서 열린 대선 불복 시위에 참석한 한 여성 시위자를 강제 연행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AFP통신에 따르면 22일 EU 27개 회원국 외무장관은 벨라루스 제재 방안을 논의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지난달 EU는 벨라루스의 대선 결과를 인정할 수 없으며 시위대 탄압과 관련 있는 관계자에 제재를 부과할 것이라고 밝혔다. EU는 다음 달로 예정된 외무장관 회의에서 다시 한번 구체적 제재 방안을 놓고 논의할 예정이다.

이민정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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