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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진돗개 정자 영하 196° 동결, 한국판 노아의 방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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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경남 함양 가축유전자원센터

질소탱크 모니터에 영하 196도가 찍혀 있다. 탱크를 가득 채운 질소가 하루 0.5인치씩 줄고 있다는 수치도 보인다. 경남 함양군 가축유전자원센터(이하 센터) 동결자원 보관실 풍경이다. 높이·지름 각 145㎝의 대형 스테인리스 질소탱크가 5개 들어서 있다. 질소탱크에는 소·돼지·닭·염소·말 등 가축 7종의 동결 정액 28만4000여 점이 보존돼 있다. 구제역·조류인플루엔자(AI) 등의 확산에 대비해 각 가축의 정자(일부 수정란 포함)를 얼려 놓고 있다. 유사시에 정액을 녹여 사라질 위기의 가축을 되살리고, 평상시엔 연구용으로 사용한다. 가축 유전자은행, 유전자 허브(Hub)에 해당한다. 탱크 하나에 20만 점, 즉 총 100만 점을 수용할 수 있다.

소·돼지·닭·말 등 28만점 영구보존 #구제역·AI 등 전염병 최후 방어선 #유사시 멸종 위기 가축 되살려내 #국가간 유전자원 확보 경쟁 일어

김성우 센터 연구사는 “탱크 하나 값이 1억원 정도다. 질식 우려가 있어 항상 2인 1조로 출입한다”며 “향후 200만 점까지 보관할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동결 정액은 반영구적이고 장거리 수송이 가능하다. 당장 돈이 되는 건 아니지만 우리 가축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마지노선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보관실 맞은편에는 초저온 냉동고실이 있다. 살아 있는 생식세포를 모아놓은 곳이 동결자원 보관소라면, 초저온 냉동고실에는 죽은 가축들의 DNA 시료가 들어 있다. 냉동고실은 영하 70도로 유지된다. 현재 소·닭·사슴·개 등 가축 9종의 DNA 7만9000여 점을 보유하고 있다. 이성수 센터장은 “DNA 시료는 100% 연구용이다. 죽은 DNA에서 생체를 복원하는 건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것”이라며 “앞으로 DNA 시료를 더욱 폭넓게 수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가축 DNA도 8만점 가까이 수집·관리  

가축유전자원센터에서 키우고 있는 한우들. 가운데 백우는 털과 망막에 색소가 없는 알비노증을 가진 희귀 품종이다. [사진 가축유전자원센터]

가축유전자원센터에서 키우고 있는 한우들. 가운데 백우는 털과 망막에 색소가 없는 알비노증을 가진 희귀 품종이다. [사진 가축유전자원센터]

남덕유산 자락에 있는 가축유전자원센터를 지난 15일 찾아갔다. 이곳에 천연기념물 7종의 동결 정자를 보존키로 했다는 뉴스를 듣고서다. 인적 드문 해발 500m 구릉지에 종합연구동이 자리 잡고 있다. 문화재청과 센터가 손을 잡고 진돗개·삽살개·경주개 동경이·제주마·연산 오계(烏鷄)·제주흑돼지·제주흑우 7종에서 채취한 정자 1062점을 냉동 보존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가축 전염병이 확산할 경우 자칫 멸종할 우려가 있는 천연기념물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다.

지금까지 주로 살아 있는 가축(생축) 위주로 보존해왔으나 이번에 반영구적 관리가 가능한 정자 동결기술을 도입했다. 보다 안정적인 보존을 위해 제주도 축산진흥원에도 동결 정액 969점을 분산했다. 육지와 바다, 이원 관리체제다. 천연기념물이란 소중한 자원을 길이 물려줄 수 있게 됐다. 김 연구사는 “한번 멸종된 동물을 복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유전자은행을 만들고, 이를 다음 세대에 전해줘야 한국 축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천연기념물 제347호 제주마. [사진 문화재청]

천연기념물 제347호 제주마. [사진 문화재청]

이곳은 한국 가축의 ‘노아의 방주’에 비유된다. 냉동 정자는 물론 생축(生畜) 3000여 마리를 직접 키우고 있다. 가축 사료용 초지를 비롯해 한우·돼지·닭·염소·오리·사슴·면양 등의 축사를 갖추고 있다. 예컨대 소의 경우 한우·칡소·흑우·백우·젖소를 망라했다. 이 센터장은 “유전자원 확보 측면에선 생축 보존이 가장 좋지만 예산·공간 등의 문제로 냉동 정자를 주로 사용한다”고 했다. 김 연구사는 “10년 전 경북 안동에서 구제역이 한창 번졌을 때 안동 칡소 40여 마리가 살처분됐는데, 당시 센터에 보관 중인 칡소 정액을 보내 안동 칡소의 맥을 잇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천연기념물 제550호 제주흑돼지. [사진 문화재청]

천연기념물 제550호 제주흑돼지. [사진 문화재청]

함양 센터는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330만㎡(약 100만평)의 넓은 산지가 요새처럼 관리되고 있다. 연구동에서 4㎞가량 떨어진 해발 700~750m에 있는 축사에 가려면 차량은 물론 개인 방역을 2중, 3중으로 해야 한다. 각 축사별로 전담 요원이 따로 있어 축사 간 이동도 자유롭지 않다. 김 연구사는 “가축 전염병은 동물 간 직접 접촉보다 차량·사람에 의해 감염되는 경우가 대다수”라며 “이곳은 가축 감염병의 최후 방어선이기에 방역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해발 700m 산지, 일반인 출입 막아

천연기념물 제265호 연산 오계. [사진 문화재청]

천연기념물 제265호 연산 오계. [사진 문화재청]

가축 정액 동결보존법은 1940년대 말 영국에서 처음 발견해 50년대 전 세계로 퍼졌다. 한국에서는 60년대 말~70년대 초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현재 한국인이 먹는 소고기의 경우 90% 이상이 동결 정액으로 인공수정한 소에서 나온다. 한우 개량의 역사가 곧 한우 인공수정의 역사인 셈이다. 돼지는 다산이기에 냉동 정자보다 주로 생축으로 번식한다.

천연기념물 제368호 경산 삽살개. [사진 문화재청]

천연기념물 제368호 경산 삽살개. [사진 문화재청]

천연기념물을 포함해 가축들은 왜 주로 정자만 동결 보존할까. 난자는 불가능한 것일까.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크기·개체수 등을 놓고 볼 때 정자 동결이 훨씬 효과적이다. 대신 살아 있는 가축은 주로 암컷 위주로 보존한다. 김 연구사는 “개별 가축의 완전 복원을 위해선 수정란 동결이 바람직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특히 조류의 수정란은 알의 크기와 비슷해 현재로선 동결보존 기술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개의 경우 반려동물 복지 차원에서 외과적 수술을 이용한 수정란 이식은 매우 조심스럽다”며 “여력이 되면 정자에 이어 체세포·수정란 동결을 늘려나갈 생각”이라고 했다.

가축들의 동결 정액·수정란을 보관한 질소탱크. 박정호 기자

가축들의 동결 정액·수정란을 보관한 질소탱크. 박정호 기자

추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명절 차례상에 올라갈 소·돼지·닭고기 등이 달리 보일 것 같다. 무심히 넘기는 고기 한 점에도 한국 축산업의 어제와 오늘이 담겨 있는 것이다. 유전자원을 둘러싼 국가 간 경쟁도 뜨거운 시점이다. 김 연구사는 “향후 식량 수요가 가장 많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가 축산업이다. 생명공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육종산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며 “생물다양성 보호를 명시한 나고야의정서가 국내에서도 2017년 발효됐다. 고유 품종은 우리의 큰 자산이다. 개별 가축을 보존하는 국가적 역량이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로나19 대재앙으로 바이러스에 대한 경계가 최정점에 달한 요즘이다. 김 연구사가 한마디 곁들었다. “구제역·AI도 끝난 게 아닙니다.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어요.” 사람이나, 동물이나 참으로 고단한 시대다.

50년 전 지리산 양떼목장에서 시작

함양 가축유전자원센터로 옮겨온 지리산 면양 시범목장 기념비. 박정호 기자

함양 가축유전자원센터로 옮겨온 지리산 면양 시범목장 기념비. 박정호 기자

‘여기 한국과 호주 양국 간에 축산기술 협력과 친선을 돈독히 하기 위하여 한·호 면양 시범목장을 완성하고 (중략) 이 비를 세운다.’ 가축유전자원센터 연구동 앞에는 작은 기념비가 있다. 1976년 12월 10일 세웠다고 적혀 있다. 이성수 센터장은 “지난해 10월 전북 남원에서 함양으로 센터를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온 것”이라며 “1971년 한국에 온 호주 연구진이 76년 귀국하면서 건립한 기념비”라고 말했다.

가축유전자원센터 김성우 연구사. 박정호 기자

가축유전자원센터 김성우 연구사. 박정호 기자

이 센터의 모태는 남원 면양 시범목장이다. 71년 호주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호주 정부의 지원을 받아 면양 2500마리를 남원 지리산 바래봉 일대에서 키우기 시작했다. 농가소득을 올려보려는 취지에서다. 한국인에게 부족한 고기를 공급하고, 양모산업도 일으키려고 했다. 50년이 지난 현재, 면양산업은 한국에서 자취를 감췄다. 수입산보다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대신 관광산업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관령 양떼목장이 대표적이다.

바래봉 일대는 봄철 철쭉 명소로 유명하다. 이 또한 호주에서 들여온 면양이 남긴 유산이다. 양들이 먹성은 좋지만 독성이 있는 철쭉은 건드리지 않아 철쭉 군락지가 생기게 됐다. 김성우 연구사는 “대관령 양떼목장의 양들도 모두 이곳의 후손이다. 센터에서도 품종 보존 차원에서 면양 79마리와 DNA 125점을 갖고 있다”고 했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