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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지리멸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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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채혜선 기자 중앙일보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몰래 즐겨보던 음란잡지를 과대표 여학생에게 들킬 뻔한 심리학과 교수, 아침 운동 때 남의 집 문 앞에 놓인 우유를 습관처럼 훔쳐 마시는 신문사 논설위원, 술에 잔뜩 취해 아파트단지 내 풀숲에서 용변을 보려다 경비원에게 딱 걸린 부장검사. 이들이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국 사회의 도덕성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학생 시절에 만든 단편영화 ‘지리멸렬’(1994)의 내용이다. 지리멸렬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찢기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음’을 뜻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봉 감독의 ‘지리멸렬’ 시나리오에는 “이들은 사회악과 범죄에 관련된 토론을 하며 저마다 자신의 평소 행동과는 맞지 않는 말들을 연거푸 해댄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 영화는 교수·논설위원·검사에게 각각 피해를 봤던 인물들이 각자의 일상을 사느라 TV 토론을 유심히 보지 않고 지나치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관심 있게 지켜봤으면 좋았으련만. 사회 고위층이건 소시민이건 지리멸렬하기는 마찬가지다.

영화 ‘지리멸렬’에서 사회 고위층들이 TV 토론에 출연해 사회문제에 관한 대담을 나누는 장면. [사진 ‘지리멸렬’ 스틸 컷]

영화 ‘지리멸렬’에서 사회 고위층들이 TV 토론에 출연해 사회문제에 관한 대담을 나누는 장면. [사진 ‘지리멸렬’ 스틸 컷]

나온 지 26년 된 이 영화를 최근 다시 생각한다. 수도권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가 시행 중이던 지난 8일. 서울시 단속 현장에 동행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몰랐다”였다. 방문자 출입명부를 마련하지 않았던 식당 사장, 오후 9시 이후 술집 앞에서 술을 먹었던 직장인들 모두 “몰랐다”며 고개를 숙였다. 몇 달째 철야 단속을 이어왔다는 한 서울시 직원은 이렇게 말하며 씁쓸함을 나타냈다. “TV나 뉴스도 안 봐요? 몇 달이 지났는데 바뀐 게 없어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불거진 지 어느덧 아홉 달이 지났다. 그사이 방역 당국이 확산세를 차단하겠다며 특정 장소의 이용을 제한하면 다른 곳으로 사람이 몰리는 풍선효과가 ‘연거푸’ 일어났다. 술집을 잡으면 공원으로, PC방을 막으면 PC가 있는 모텔로 인파가 모여들었다. 정부가 추석 연휴 기간 이동 자제를 권고했지만 ‘추캉스(추석+바캉스)’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사회적 비판 대상이 그저 ‘TV 속 인물’이기만 한 걸까. 인스타그램에 접속할 때마다 모임을 즐기는 지인들 사진을 수십장씩 본다. 지하철 타기는 무섭다면서도 회식엔 빠짐없이 참석한다. 재택근무 지시가 떨어졌더니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나선다.

서울 한강공원에 사람이 바글바글 하다며 동영상을 보내준 한 지인은 동호회 캠핑을 가던 길이었다.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건 뉴스 속 그들만이 아니다. 들려오는 방역지침을 딴 세상 얘기로 취급하며 허투루 흘려보낸 건 남이 아니라 나다. 지리멸렬한 이 시기를 어떻게 하면 끝낼 수 있을지 각자의 고민과 그에 맞는 행동이 필요하다.

채혜선 사회2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