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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대통령의 유체이탈식 ‘공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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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문재인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엔 심각하다. 그제 첫 청년의 날 기념식에서 그는 ‘공정’이란 단어를 37회나 언급했다. 그러면서 “채용, 교육, 병역, 사회, 문화 전반에서 공정이 체감돼야 한다”고 했다. 특히 병역 비리 등에 대해선 “공정에 대한 청년들의 높은 욕구를 절감하고 있고 반드시 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아들의 군 시절 ‘휴가 특혜’ ‘통역병 민원’ 의혹을 받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병역 면탈과 같은 위중한 범법 사항은 아닐지 몰라도 집권여당 대표의 ‘엄마 찬스’는 명백한 불공정 행위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문 대통령의 말대로 ‘공정’은 “촛불혁명의 정신이며 우리 정부의 흔들리지 않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공정’의 잣대를 ‘불법이냐 아니냐’로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조국 사태’ 때도 각종 비리 혐의가 드러난 것은 물론, 도덕성까지 큰 치명타를 입었지만 장관 임명을 강행했다. 오히려 ‘마음의 빚’을 말하며 그를 감쌌다. 보수 정권에서조차 일찌감치 낙마할 만한 사안이었는데도 말이다.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민은 윤리적 관점에서 공직자의 자격을 논하는데 대통령과 여당은 범죄 사실의 유무로 한정해 제 식구를 보호하기에 급급하다.

원래 공정과 정의는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넘어 도덕과 상식을 포함하는 폭넓은 사회규범에 속한다. 공직자에겐 일반 시민보다 높은 도덕적 기준이 요구되므로 불법이 아니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영어로 ‘정의’를 뜻하는 법무장관(Minister of Justice)은 그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정권의 도덕 교과서와 같은 자리다.

그런 자리에 두 명씩이나 연이어 정의의 기준을 무너뜨리는 사람을 장관으로 앉혔으니 그 책임은 오롯이 인사권자인 대통령에게 있다. 스스로 공정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공정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하겠다”고 말로만 하니 청년들이 진정성을 느낄 수 있겠는가. 실제로 추 장관의 ‘엄마 찬스’ 이후 20대의 지지율이 급락하지 않았나.

문 대통령은 “기득권이 부와 명예를 대물림한다”고 했는데, 현 집권 세력 스스로가 불공정의 기득권이 된 지 오래다. 가뜩이나 좌절하고 실망한 청년들에게 듣기만 좋은 화려한 수사는 상처를 더욱 덧나게 할 뿐이다. 공정을 실천할 의지가 없다면 차라리 말이라도 꺼내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