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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수도원, 포도주 생산·소비 이끈 ‘탐식가의 소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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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4호 24면

[와글와글]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일러스트=전유리 jeon.yuri1@joins.com

일러스트=전유리 jeon.yuri1@joins.com

자료를 찾다가 『장미의 이름』에 손이 닿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세계적인 언어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베스트셀러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번이나 도전했지만, 이 책에 별다른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화자인 아드소 수사가 스승 윌리엄 신부와 뮌헨에서 작별하는 장면에 눈길이 꽂히면서 한숨에 다 읽어 버렸다.

성경·문서 필사로 지친 수도사들 #포도주 마시며 스트레스 풀어 #수도원 앞에 넓은 포도밭 경작 #에코, 포도주 심부름하다 책 몰두 #8세 소년의 호기심과 도전 자극 #세계적인 기호학자 만든 원동력

“우리가 사는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대역병(흑사병) 시기에 윌리엄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주 오래 뒤에 들었다.”

팬데믹이라는 코드를 통해 700년의 긴 시간을 건너뛰어 이 소설과 다시 연결된 것이다. 『장미의 이름』은 흑사병이 아직 유행하기 이전인 1327년 11월 말에 수도원에서 평생 양피지에 필사하면서 살아온 수도사들을 배경으로 7일 동안 벌어지는 추리소설이다. 중세의 역사, 언어, 부호에 해박한 사람답게 수도원과 도서관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는데, 책의 머리말에는 중세시대 지식인 토마스 아 켐피스의 고백을 흥미롭게 인용하고 있다. “내가 모든 것에서 평안을 찾아보았으나 그 평안은 구석에서 책과 안에 있을 때가 아니면 발견하지 못했다.”

흑사병 유행 이전 수도원 묘사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며, 엄청난 규모의 서재를 보유하고 또 그만큼의 책을 섭렵한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기도 할 것이다. 에코의 표현 그대로 가끔은 ‘지적 허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그 지루함마저 즐거울 수 있는 것은 소설 곳곳에 들어있는 포도와 포도주 이야기 덕분이다. 사건의 현장 수도원을 방문한 첫날부터 수사들은 치즈, 올리브, 빵과 함께 포도주를 날라다 준다. 수도원 창시자는 원래 검소한 음식을 규정했지만, 두 사람이 방문했을 당시 수도원은 ‘탐식가의 소굴’로 변했다고 개탄하고 있다.

“원장이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의 질을 자랑하면 우리는 음식이 대단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모금 또는 한입마다 영적 독서가 동반되지 않았다면 이 자리는 여느 탐식가들의 모임 같았다.”

성찬식에 필수품인 포도주는 특별한 존재였다. 아직 인쇄술이 없던 시절 수도원 도서관에서 수도사들은 성경과 희귀문서를 공들여 필사했다. 정상적인 날씨라 하더라도 대여섯 시간 계속 쓰다 보면 손가락에는 경련이 나고 심한 통증이 느껴져, 필사본 여백에 수도사들이 이런 문구를 남길 정도였다고 작가는 증언하고 있다. “아, 포도주 딱 한 잔만 마셨으면.”

매일 똑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수도사들의 인간적인 모습이다. 소설 속의 화자인 젊은 수사 아드소는 사건이 벌어지는 수도원 안의 식당에서 인생에 딱 한 번 낯선 여자와 밀회를 하게 되는데, 그날 밤의 뜨거운 장면을 역시 포도주에 비유하고 있다. “사랑은 포도주보다 감미롭고 화장 기름은 매우 향기로웠다. …그대 숨결에서는 사과 냄새가 나고 젖무덤은 포도송이며 입천장은 내 사랑을 통해 내 입술과 이빨 사이로 흐르는 진한 포도주니….”

열정의 시간이 끝난 뒤 그는 ‘성교가 끝나면 모든 짐승은 슬퍼한다’는 라틴어 격언을 떠올리면서 포도주에 비유한 시편 구절도 중얼거린다. “보라, 내 가슴은 봉인된 새 포도주, 그릇마다 넘치는 포도주와 같다.” 그날 밤의 뜨거웠던 일을 평생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다가 속죄하는 마음에 회고록을 쓰기에 이르니 그것이 곧 『장미의 이름』이다.

작가 움베르토 에코가 태어나 처음으로 책에 호기심을 느낀 것은 포도주 덕분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인쇄공이었는데, 심부름으로 지하실에 포도주 한 병을 가지러 내려갈 때 그곳에서 아직 제본되지 않은 책들이 궤짝에 담겨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는 여덟 살짜리 소년에게 굉장한 분량이자 도전의 대상이었다고 고백했다. 이처럼 와인과 글은 그의 인생에 동전의 앞뒤와 같다.

이 소설의 화자 아드소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 인근에 있는 멜크수도원 소속으로 그곳에서는 맥주가 더 판을 치고 있으며 무진장 마셔댔다고 말하고 있고, 사건이 발생한 수도원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있던 어떤 수도원이라고 묘사되어 있지만 숀 코너리가 주연한 영화는 독일 에베르바흐수도원에서 주로 촬영됐다. 에베르바흐는 1136년에 세워져 9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수도원이다. 작품의 배경인 14세기에는 최소 150명, 많을 때는 500명 가까운 수도사들이 생활했던 곳으로 아직도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특히 이 수도원 정문 앞은 1239년에 시작돼 독일에서 가장 넓은 포도원 경작지이며 괴테가 무척 좋아했던 슈타인베르크 와인 산지이기도 하여 연중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소설 곳곳 포도주 이야기 가득

“포도밭과 농부들에게서 십일조를 걷고 마구간과 돼지우리를 돌보아 사람들은 번영하고 수도원을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소설 속의 재정담당자가 종교재판에서 항변하는 것처럼 중세시대 수도원은 자급자족 경제가 지배하는 곳으로, 수도원은 세금이 면제돼 교회가 와인 생산과 소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로마제국 이후 위기에 처한 와인산업이 유지될 수 있었던 데는 수도원 역할이 매우 컸다. 에베르바흐수도원에는 중세시절의 포도주 출납 서류가 보존돼 있으며 와인 제조용 압착기도 볼 수가 있다. 이 압착기를 가리켜 영어로는 와인 프레스(press)라 한다. 와인이나 인쇄는 모두 비슷한 원리로 작업이 이뤄졌으니 와인과 글은 ‘와글와글’ 본래부터 하나인 것이다.

소설은 광신과 미신, 이단이 판을 치던 어두운 14세기가 배경이다. 그러나 2016년 세상을 떠난 움베르토 에코가 남긴 말들은 마치 혼란스런 이 시대를 예견하는 듯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학문은 쇠퇴하고 온 세상이 뒤죽박죽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모조리 벼랑으로 떨어진다. 날지도 못하는 새 새끼들이 둥지를 떠난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를 지낸 인문여행 작가.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me,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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