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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ㅂㅈㅇ] “우리가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기후우울’ 호소하는 1030세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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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알고 있는 시한폭탄 같아요. 식탁 밑에서 시한폭탄이 째깍째깍 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너무 편안하게 밥을 먹고 있는 거죠."

대학생 양준하(20)씨는 기후위기가 심각하다는 걸 깨닫고 느낀 불안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뭔가를 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 계속 고립되고 고독해지면서 우울감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기후위기로 인해 우울감에 빠지는 이른바 ‘기후 우울’(climate depression)을 겪었다는 겁니다.

'기후 우울'은 '기후위기로 미래가 사라졌다’는 인식이 슬픔, 상실감, 분노 등 부정적 감정으로 이어지는 심리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올여름 우리나라에 쏟아진 역대 최장 장마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홍수, 폭염, 산불 등 각종 이상기후 현상이 나타나면서 준하 씨와 같이 기후우울을 느끼는 1030세대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가 물리적인 피해만 낳은 것이 아니라 젊은 층의 정신건강까지 위협하고 있는 겁니다.

기후우울이라는 공식적인 정신질환 분류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해외에선 이미 기후위기가 정신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기후불안(climate anxiety)’, ‘생태불안(eco-anxiety)’이라고도 부르며 활발히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심리학회(APA)는 2017년 보고서에서 “환경 파괴에 대한 만성적인 두려움”을 느끼는 상태를 ‘기후불안증’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발생한 산불의 여파로 샌프란시스코 하늘이 9일(현지시간) 주황빛 연기에 뒤덮였다. 기후학자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과 가뭄을 대형 산불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발생한 산불의 여파로 샌프란시스코 하늘이 9일(현지시간) 주황빛 연기에 뒤덮였다. 기후학자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과 가뭄을 대형 산불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기후위기는 '생존'이 걸린 문제"  

‘고작 날씨 때문에 우울증에 걸린다고?’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후우울을 느끼는 이들은 기후위기가 단순히 변덕스러운 날씨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이야기합니다. 동남아 지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대학생 윤소정(22)씨는 “(동남아에 살 때) 이번에 한국에 온 태풍만큼 강한 태풍이 주기적으로 와 학교 지붕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실종됐다”며 “주변에서 인명피해가 나오는 걸 보면서 기후위기를 피부로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양준하 씨는 기후변화의 본질을 분석한 나오미 클라인의 책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를 읽고 ‘빙하 위 북극곰’ 정도로만 인식했던 기후 문제를 실제 데이터를 바탕으로 바라보게 됐다고 했습니다. “‘우리 세대가 정말 마지막 세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기후위기가 삶의 제1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해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고 말합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2018년에 채택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제사회는 2100년까지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내로 제한해야 합니다. 1.5도 넘게 오르면 극한 고온, 해수면 상승 등 자연재해와 돌이킬 수 없는 생태계 파괴가 발생할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현재 수준으로 탄소를 배출할 경우, 불과 7년 뒤면 1.5도 선에 도달한다는 게 과학자들이 고안한 ‘탄소 시계’가 보여주고 있는 전망입니다.

전 세계 탄소배출량을 토대로 지구 평균 온도 1.5도 상승까지 남은 시간을 보여주는 '탄소 시계'. 이 시계에 따르면 1.5도 상승까지 현 시점 기준 7년 3개월이 남았다. [MCC연구소 캡처]

전 세계 탄소배출량을 토대로 지구 평균 온도 1.5도 상승까지 남은 시간을 보여주는 '탄소 시계'. 이 시계에 따르면 1.5도 상승까지 현 시점 기준 7년 3개월이 남았다. [MCC연구소 캡처]

'또 이상한 소리하네'…기후우울 부르는 무관심

기후우울을 경험한 이들은 이렇게 시간은 흐르고 있는데, 주변은 무관심하고, 사회변화는 더딘 모습에 우울해졌다고 말합니다. 소정 씨는 “내가 느끼는 심각성은 너무 크고 날씨도 이를 보여주고 있는데, 인터넷에 글을 올리거나 친구들에게 얘기해도 돌아오는 건 무관심이고, 가족마저 ‘쟤 또 이상한 소리 하네’하고 말아 힘이 빠졌다”며 “특히 축산업이 기후위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목소리 내려고 할 때 제지당하거나 믿어주지 않아 더 깊게 절망했다”고 했습니다.

프리랜서 이솔(22)씨도 “나는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후위기를 막는 실천에 힘쓰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기 일인데도 신경 쓰지 않고 ‘욜로’(YOLO)하며 사는 모습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고 털어놨습니다.

기성세대에게는 분노를, 미래 세대에게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기후우울을 앓는 과정에서 나타난 공통점이었습니다. 대학생 강다연(22)씨는 ”우리 세대는 기성세대의 젊은 시절과 달리 미세먼지, 폭염, 홍수로 고통받으면서 더는 여유롭고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아닌가”라며 “기사 댓글에서 ‘나는 살 만큼 살았다’, ‘나는 지구 망하는 거 보고 갈 거다’ 식의 말을 보면 분노를 넘어서 인류애가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기후활동가 미어캣(30·활동명)씨는 “미래에 더 큰 재난이 왔을 때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은 우리와 미래 세대”라며 “다음에 태어날 세대의 생존이 힘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작은 변화가 우울감 낫게 해"

그런데도 이들은 아직 포기할 순 없다며 기후우울에 빠져있는 대신 사소한 변화라도 끌어내고 싶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준하 씨는 “기후위기는 사실 탄소 배출에 앞장선 기업과 정부가 바뀌어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은 무력감을 느끼기 쉽다”면서도 “하지만 가만히 있는 대신 사소한 행동이라도 할 때 우울이 해소되는 것 같다. 작은 목소리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믿는다”고 희망했습니다.

다연 씨도 “기후위기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변화를 보지 못하니 절망하는 것 같다”며 “모두가 조금씩만 관심을 가져도 큰 목소리가 되기 때문에 기후위기 관련 SNS를 팔로우하는 등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 내내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어나가던 다연 씨는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을 묻자 이렇게 힘줘 말했습니다. “꼭 많은 사람이 동참해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아직 희망을 놓기 힘들고 최악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ㅈㅂㅈㅇ(정보좀요)

'ㅈㅂㅈㅇ'는 시사 이슈를 접하다가 드는 의문점을 알기 쉽게 풀어주는 '지식형 영상' 시리즈입니다. 'ㅈㅂㅈㅇ'는 '정보좀요' 초성을 연결해 만들어진 신조어로 정보를 알려달라고 할 때 댓글란에 다는 표현입니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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