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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산티아고 가는 길서 만난 교도소 출신 미국 여성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51)

야고보의 유해가 표류해 닿은 마을 파드론(Padron). [사진 박재희]

야고보의 유해가 표류해 닿은 마을 파드론(Padron). [사진 박재희]

아침부터 장대비가 맹렬하다. 발목까지 잠기는 길을 걸으며 샌들 신은 발이 노를 젓고 있다고 상상하니 기분이 좀 나아진다. 발가에서 7km 북쪽에 위치한 파드론에 도착했다. 따져보면 이곳이야말로 산티아고 순례의 기원이 된 곳이다. 전설대로라면 산티아고의 유해를 실은 배가 지중해와 대서양을 표류하다 당도한 곳이니까. 산티아고(Santiago)는 성(Sant) 야고보(iago)라는 스페인어로 예수의 12제자 중 야고보를 가리킨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순교했지만 그의 매장은 허락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묻히지 못한 야고보는 바다를 헤매다 하필이면 생전에 그가 선교하던 스페인으로 흘러왔으니 얼마나 극적인가. 파드론에서 20여 km 떨어진 지점에 묻혔고 그로부터 1000년이 지난 후 그의 무덤이 발견된다. 그 자리에 지은 교회가 바로 해마다 수십만 명의 순례자가 찾아가는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성당인 것이다.

이리야였던 마을 이름은 표류해 온 배의 밧줄을 묶어 두었던 기둥(오페드론)을 상징하는 파드론이 된다. 배를 정박했던 기둥이 마을 중심에 위치한 산티아고 성당에 모셔져 있고 산티아고의 유해가 도착한 사건을 묘사한 성화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성인과 관계된 스토리 대부분이 그렇지만,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기적 신화’의 반열에 올린 물리적 증거인 셈이다.

강 건너 파드론을 내려다보는 야트막한 언덕이 산티아고가 갈리시아 포교를 했던 산이다. 적지 않은 순례자가 ‘야고보 성인은 죽어 이곳으로 오려고 작정을 했던 것’이라고 믿으며 산에 올라 기도를 드린다. 무늬만 신자인 나는 맛집을 찾아 점심을 먹고 씩씩하게 출발했다.

숲길 10km는 힘에 부쳤다. 애를 써봐도 다리는 무겁고 무릎은 일정 간격으로 전기충격기에 닿는 것처럼 찌릿찌릿 아프다. 멈춰 쉬다 걷고 다시 쉬기를 반복하니 속도도 나지 않았다.

갈리시아 지방의 곡식창고 오레오. [사진 박재희]

갈리시아 지방의 곡식창고 오레오. [사진 박재희]

“헤이~ 스트레인저!” 퍼져있던 나를 부른 사람은 수잔이다. 처음 보는 나를 마치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여고 동창생을 대하듯 스스럼없는 수잔이 난 조금 두려웠다. 부끄럽지만 순전히 외모 때문이었다. 평생 내가 실제로 만난 사람 중 말 그대로 가장 ‘험상궂은’ 인상이다. 쳐다보는 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상처가 있는 얼굴. 왼쪽 이마 전체와 오른쪽 볼을 움푹하게 파고 윗입술까지 뒤틀리게 꿰맨 자국. 폭력영화에서 말할 수 없이 흉악한 일을 당했거나 저지른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특수분장만큼 과격했다. 치아 사이가 벌어져 그 사이로 새는 목소리는 거칠다. 외모로 누구를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무례한 일도 없지만, 순례자 이미지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활기 넘치는 수잔 옆의 매튜는 전형적인 미남형이었다. 좀 과하다 싶은 눈웃음을 얹은 표정에 매끈하고 반질거리는 말투지만 인텔리 느낌이 확연했고 교양이 넘쳤다. 말할 수 없이 기묘한 조합의 커플은 대체 어떤 사이일까? 일단 어울린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날씨 이야기, 통증과 컨디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난 후 연인관계로 보이는 두 사람이 궁금해졌다. 한참을 망설이다 물어봤는데 그녀의 대답이 의외로 쿨하다.

"얘기가 길어. 짧게 하자면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만난 분이 있었어. 매튜는 바로 그분 동생이야.”
“아….”(놀라지 않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싫었는데 평생 처음으로 존경하게 된 분이야. 내게 정말 잘해주셨어.”
“아, 그랬구나.”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나랑 정반대의 삶을 사신 분인데 이름은 나와 같았어. 수잔. 우아하고 겸손하고 공부를 많이 한 여성이었어. 내게 화해하지 못한 남동생 얘기를 많이 해줬어. 바로 매튜지.”
“장례식에서 만났고 함께 산티아고를 걷기로 했어요.”

처음 들었을 때 나를 놀리려고 둘이 꾸며낸 말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지나치게 극적인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에 대한 의심은 함께 걷는 동안 사라졌다. 수잔이 주로 얘기를 했고 매튜는 웃으며 두 눈에 애정을 담아 수잔을 바라본다. 매튜는 웃을 뿐 거의 말은 하지 않았고 가끔 그녀의 머리카락에 떨어져 붙어있는 지푸라기 같은 것을 떼어줬다. 너무나 다르고 어울리지 않아 보였던 둘은 내가 평생 본 그 어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토리를 가진 커플이다.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수잔은 전과가 있는 미국 여성이다. 인생을 험하게 살다가 교도소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닮고 싶은, 존경하는 사람을 만났고 출소 이후에도 교류했다. 수잔이 의지하고 존경하던 멘토 수잔은 몇 년 전 암으로 죽었다. 그녀 장례식에서 런던에 살고 있는 동생 매튜와 만난다. 둘은 만나자마자 특별한 감정에 빠졌고, 감정을 확인하고 싶어 산티아고를 걷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실제로 벌어지는 일에 비해 영화나 드라마, 소설 스토리는 오히려 시시하다.

수잔과 매튜는 산티아고 이후 어떻게 될까? 뉴올리언즈에서 숍을 운영하는 여인과 런던에서 특허관계일을 한다는 남자, 둘은 어떤 결론을 내게 될까? 거듭 상상해보려 해도 쉽지 않았는데 결국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이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둘이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다는 것뿐이란 것.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예측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눈앞의 놀라움과 기쁨이 넘치는데 오지 않은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을까? 삶은 알 수 없는 신비로 가득하다.

두 사람과 함께 하면서 기운이 나고 어쩐 일인지 무릎이 아픈 줄도 모르고 힘차게 걸었다.

테오(Teo)의 알베르게. [사진 박재희]

테오(Teo)의 알베르게. [사진 박재희]

“잘 쉬어. 그래야 한다면 우린 다시 만나겠지.” 내가 테오에서 멈추겠다니까 수잔이 볼 뽀뽀를 하며 남긴 작별인사다. 다시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다시 만나게 되는 ‘산티아고 가는 길의 법칙’을 말한 것이다. 까미노에서는 많은 사람이 스치지만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사람을 만나 꼭 필요한 만큼 함께 하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 헤어지든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다시 만난다. 경험하지 않은 이에게 설명해줄 방도를 아직 찾지 못했지만 순례자라면 모두 이 신비를 안다.

힘과 생동감을 준 수잔과 매튜를 만나게 된 것만큼 돌연 헤어지게 된 것에도 필연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혼자 정리할 시간이기도 했다. 내일이면 산티아고로 간다. 도보여행 30일째, 다시 심해진 무릎 통증을 달래며 나는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 재희에게…’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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