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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립스틱으로 그린 그림, 전시 열자 불티나게 팔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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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전병현 작가가 립스틱으로 그린 '루즈 스토리' 연작. [나마갤러리]

전병현 작가가 립스틱으로 그린 '루즈 스토리' 연작. [나마갤러리]

전병현 작가의 '루즈 스토리' 연작 [나마갤러리]

전병현 작가의 '루즈 스토리' 연작 [나마갤러리]

전병현 작가가 립스틱으로 그린 자화상. [나마갤러리]

전병현 작가가 립스틱으로 그린 자화상. [나마갤러리]

하얀 화면에 눈을 감고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의 얼굴. 머리엔 온통 꽃이다. 빨강, 분홍, 오렌지, 그리고 파랑과 드문드문 눈에 띄는 갈색···. 속도감 있게 인물을 그려나간 작가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유화도, 수채화도 아닌 이것은 립스틱만으로 그린 그림. 서울 돈화문로 나마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있는 화가 전병현(63) 작가의 '루즈 스토리' 연작이다.

서울 나마갤러리 전병현 개인전 #프랑스 보자르 출신 작가의 도발 #재료는 립스틱, 민화적 기법 결합 #"강렬한 붉은 색상 상서로운 기운"

이 작품들을 전시에 내놓으며 "다른 작품은 몰라도 립스틱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작가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1~3층 공간에서 선보이는 전 작가의 전 작품 중 컬렉터들이 앞다퉈 선택한 것은 1층의 '풀꽃 시리즈'나 2층의 '나무꽃 시리즈'가 아니라 3층의 '루즈 스토리'였던 것. 박주열 나마갤러리 대표는 "전시를 개막하자마자 루즈 스토리 20점 중 15점이 순식간에 팔려나갔다"고 전했다.

전 작가의 작품 50여 점으로 3개 층을 채운 이번 전시는 마치 3인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주듯이 각 층의 작품들의 개성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1층엔 전시된 야생 풀꽃 그림은 하늘하늘 청초하고, 2층에 걸린 한지 바탕의 나무 그림은 투박하고 정겹다. 작가가 파주 고향 집을 떠올리며 작은 캔버스에 그린 소박한 집 그림은 보는 이의 향수를 자극한다.

나마갤러리 3층에 전시된 루즈 스토리 연작 앞에 선 전병현 작가. [나마갤러리]

나마갤러리 3층에 전시된 루즈 스토리 연작 앞에 선 전병현 작가. [나마갤러리]

루즈 스토리 연작 앞에 선 전병현 작가. 민화적인 요소를 곁들인 작품이 눈에 띈다. [나마갤러리]

루즈 스토리 연작 앞에 선 전병현 작가. 민화적인 요소를 곁들인 작품이 눈에 띈다. [나마갤러리]

"전시 염두에 두고 그리지 않았다"

1980년대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벽화를 공부한 작가는 한지로 만든 부조 바탕에 수용성 안료를 사용해  습식 벽화 기법으로 작업한 '블로썸' 연작으로 유명하다. 그러다 자신에게 재료를 대주던 한지 장인이 세상을 떠난 후 2017년부터 직접 닥나무를 키우며 한지를 만들어오고 있다. 서울에 사는 작가는 매일 새벽 4시에 곤지암에 자리한 자신의 닥나무 농장을 찾고, 10시에 작업실로 돌아와 농장 주변에 핀 꽃들을 화폭에 담아왔다.

그런 그에게 립스틱 그림은 아예 전시를 염두에 두고 그려진 게 아니었다. 전시를 준비하던 갤러리 대표가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가 우연히 보고 반해 계획을 바꿔 전시작 목록에 넣은 것. 박 대표는 "본래 전시는 1, 2층에서만 소개할 예정이었는데 립스틱 그림을 본 후 3개 층 전시로 확대했다"고 말했다.

전병현 작가는 "2년 전부터 재미로 틈틈이 그려온 립스틱 초상화"를 가리켜 "그동안 인터넷에서 그림을 소재로 많은 사람과 소통해온 결과"라고 했다. "어느 날 우연히 아내의 화장 서랍에 있는 십여 개의 립스틱을 봤는데 아내에게 물어보니 쓰지 않는 것이라고 하더라. 수많은 여성이 이런 걸 집에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랜선 저편의 사람들과 교감하며 그림을 그려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직접 닥나무 키우며 한지 벽화 작업도  

전병현 작가의 '풀꽃' 연작. [나마갤러리]

전병현 작가의 '풀꽃' 연작. [나마갤러리]

전병현 작가의 '풀꽃' 연작. [나마갤러리]

전병현 작가의 '풀꽃' 연작. [나마갤러리]

전병현 작가의 나무꽃 연작. 고졸하고 투박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나마갤러리]

전병현 작가의 나무꽃 연작. 고졸하고 투박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나마갤러리]

전병현 작가의 나무꽃 연작. 경기도 곤지암에서 닥나무를 직접 키우며 한지를 직접 만들어 습식 벽화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 [나마갤러리]

전병현 작가의 나무꽃 연작. 경기도 곤지암에서 닥나무를 직접 키우며 한지를 직접 만들어 습식 벽화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 [나마갤러리]

2001년부터 '싹공일기'라는 제목으로 들풀 일기를 쓰며 그림을 소개해온 그가 인터넷에 "쓰지 않는 립스틱 보내주면 그림을 그리겠다"는 글을 올리자 세계 곳곳의 여성들이 그의 작업실로 쓰던 립스틱을 보내줬다. 순식간에 1800여개의 립스틱이 모였다. SNS에서 그의 작업 소식이 알려지자 명품 화장품 브랜드에서 샘플을 보내주기도 했다.

전 작가의 립스틱 그림은 이른바 '핑거 페인팅'이다.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립스틱을 손에 묻혀 쓱쓱 사람의 형상을 그리고, 세밀한 부분은 깎은 붓을 이용해 표현한다. "립스틱 그림을 그리며 내가 생각한 것은 '행복(happiness)'이었다"는 그는 "코로나 시대에 마스크로 속에 가려진 입술과 미소를 제 그림을 통해 이렇게 전면에 드러내게 돼 기쁘다"고 했다.

"강렬한 레드, 생동감 매력"  

박주열 대표는 "많은 여성이 립스틱으로 입술을 그려왔지만, 이를 재료로 캔버스에 그림을 실제로 그린 것은 전 작가가 처음일 것"이라며 "관람객들은 작가가 창의적인 발상으로 고정관념을 깨뜨린 그림을 무척 신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박 대표는 이어 "붉은 계통의 강렬한 색상, 문자도와 같은 민화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도 작품에 매력을 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생동감 있는 색상과 호랑이 등 민화에서 차용한 요소들이 작품에 상서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안현정 미술평론가는 "립스틱은 소비사회 속 무의식적인 욕망을 상징한다"며 "전병현 작가가 그린 화면 속 인물들은 모두 눈을 감은 채 세상을 버텨내는 우리 시대의 얼굴로 블랙코미디와 같은 정서를 불러일으킨다"며 "고 말했다.

립스틱 그림엔 파랑, 검정 등 의외의 색깔도 눈에 띈다. 그 "피부색에 따라, 또 취향에 따라 세계 여성들이 선호하는 색상이 천차만별이더라"며 "온갖 립스틱을 재료로 쓰다 보니 브랜드마다 성분 등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 제가 립스틱 전문가"라며 웃었다. 전시는 2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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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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