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아버지는 왜 언니한테만 무장해제 당하는 걸까

중앙일보

입력 2020.09.16 15:00

[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29)

“네 언니가 자꾸 나가자 하는데?”
“맛있는 거 사드리려나 보다, 다녀오세요.”

근무시간 중 아버지가 전화를 주셨다. 보이스 피싱으로 의심되는 이상한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를 한참 하시더니, 외식해도 되겠느냐 은근히 물으셨다. 나는 별걸 다 물어보신다 생각하며 흔쾌히 다녀오시라 말씀드렸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오늘 하루를 브리핑하셨다. 언니2 성화에 함께 차를 타고 나갔는데, 예전에 살던 김포를 지나 강화까지 가더란다. 목적지는 소문난 장어집. 그런데 코로나 불황 탓인지 영업을 하지 않아 허탕 쳤고, 언니가 급히 검색해 다른 집을 찾아갔는데, 바다가 보이는 화려하고 널찍한 식당이었다고.

퇴근을 하고 돌아오니 아버지가 언니2와 함께 다녀온 장어 식당에서의 일을 브리핑하셨다. [사진 pixabay]

퇴근을 하고 돌아오니 아버지가 언니2와 함께 다녀온 장어 식당에서의 일을 브리핑하셨다. [사진 pixabay]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사실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입으로는 “네에…” 하고 장단 맞추며 내 방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말씀을 바로 멈추신다. 아차, 싶어 돌아보니 “듣는 사람이 집중해서 들어야 말하는 사람이 신이 나서 하지” 하신다. 분위기가 이게 아니구나 싶어 아예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집중해 듣기로 한다. 전망 좋은 식당의 규모와 깨끗한 실내, 상위에 현란하게 펼쳐진 반찬들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 이어진 뒤 이야기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바닷장어가 좋으냐, 민물장어가 좋으냐 묻기에 나는 당연히 ‘바닷장어!’라 했지. 그런데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살짝 메뉴판을 봤더니, 민물장어는 9만원인데, 바닷장어는 11만원이잖아!”
“그래서 다시 바꿨어요?”
“이미 굽고 있는데 어떻게 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맛있게 먹었지!”

요약하면 본인은 집에서 내가 준비해 둔 음식으로 간소하게 먹고자 하였으나 언니 성화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고, 경치 좋은 곳에서 값비싼 장어 요리를 맛있게 드셨다는 이야기. 여기까진 훈훈하고 좋았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소주도 한 병 시켜서 마시고 남은 것 가지고 왔다. 천사 같은 딸이 그렇게 나한테 잘하는데, 밖에 나가지 말라는 네 말 듣느라고 처음에 안 간다고 고집부리고 화낸 게 가슴 아프고 미안했다.”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내가 나가지 마시라 했다니. 바쁜 언니가 와서 아버지 모시고 식사한다는데, 그걸 말리는 동생이 있을까? 한약을 드시는 중인데 음주는 또 웬 말인가? 옷 갈아입고 저녁 준비를 하는데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슬슬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버지 귀가 어두우시니 “잘 다녀오시라”는 말이 “나가지 마시라”로 들렸다는 것쯤이야 그렇다 치자. 본인이 직접 모시고 가서 한약을 지어와 놓고, 약 드시는 동안 피해야 할 가장 첫째 음식인 술을 드시게 하다니. 그것도 평소 술을 자주 드시지도 않는 분을 일부러 모시고 나가서 말이다. 까다로운 주의사항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이 아니다. 지난주엔 짜장면과 탕수육을 배달시켜 함께 드셨다 했다. 밀가루와 돼지고기, 기름진 음식 역시 피해야 할 주 종목이다.

쇠고기무우국에 호박나물, 오이지, 창난젓, 볶음김치, 동태전. 꼼꼼히 따져 준비했음에도 창난젓 같이 짠 것을 먹어도 되느냐 염려하셨다. [사진 푸르미]

쇠고기무우국에 호박나물, 오이지, 창난젓, 볶음김치, 동태전. 꼼꼼히 따져 준비했음에도 창난젓 같이 짠 것을 먹어도 되느냐 염려하셨다. [사진 푸르미]

한의원에서 받은 주의사항. 냉장고에 붙여놓고 칼같이 지키신다.

한의원에서 받은 주의사항. 냉장고에 붙여놓고 칼같이 지키신다.

나와 저녁 드실 때는 차려놓은 반찬들과 주의사항이 적힌 종이를 대조해 가며 “매운 것은 안 된다 하니 김치는 안 먹겠다, 그럼 짠 음식은 괜찮은 것이냐?” 깐깐하게 따지던 분이 언니 앞에선 왜 그렇게 무장해제가 되는지.

실은 말복 때 나도 아버지 모시고 장어집에 갔었다. 장어는 불에 직접 구워야 제맛이라는 아버지 말씀에 따라 숯불구이 집을 찾아갔다. 다리가 불편하신 것을 고려해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찾아, 원래 11시 30분에 문 여는 곳임에도 아버지가 점심을 일찍 드시니 11시경 가면 안 되겠느냐 미리 양해까지 구해 찾아간 곳이었다.

소금구이 반, 양념구이 반을 주문해 칼칼한 된장찌개에 밥 한 그릇 싹 비우고 나오는 길, 아버지 표정이 이상했다. 만족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한 숯처럼 붉으락푸르락 이었다. 의아했지만 괜한 불똥이 튈까 싶어 잠자코 따라 걸었다. 지하철을 타신 뒤 아주 불쾌한 표정으로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무슨 장어가 6만원이나 하나, 크기도 작고 서비스도 엉망인데.”
내가 계산할 때 메뉴판을 살짝 보신 모양이다. 골목 안 작은 식당이긴 했지만, 장어 하나에 집중해 보았을 땐 가성비 높은 집이라 생각했던 나는 짐짓 놀랐다. 어느 대목에서 기분 상하셨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버지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저녁 식사로 평소 좋아하시는 아귀찜을 주문하려다 “너는 왜 그렇게 자꾸 돈을 쓰니?” 하는 핀잔까지 들었다. 나는 그 날 장어 가격이 아버지 생각보다 비싸서 그러신가보다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오늘은 11만 원짜리 장어를 가격을 알고 드셨는데도 저렇게 기분이 좋으시다니. 굳어진 내 표정에 이번엔 아버지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나 역시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마음으로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드시고 싶은 것 맛있게 드셨으면 그것으로 됐지.’하면서도 착잡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늦은 밤 일기를 쓰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겐 누구나 ‘지킬 앤 하이드’와 같은 양면이 있다는데, 혹시 아버지도 나와 언니2 사이에서 그러한 본능이 발현되는 건 아닌가 하는. 함께 사는 나와의 일상은 매우 규칙적으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눠 지킨다면, 잠시 다녀가는 언니와는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나오는 게 아닐까.

그간 금연 말고는 아버지에게 뭔가를 강권한 적 없다 생각했는데, 아버지 나름대로 갑갑한 부분이 있으셨나 보다. 나로선 다소 억울한 감도 없진 않지만 그러려니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혹시 언니가 형부카드 찬스를 쓴 것으로 생각하고 6만원과 11만원의 무게를 다르게 적용하신 건 아닌지 살짝 의심이 밀려오기도 하지만 말이다.

* 추신: 작은 일을 확대 해석해 글감으로 삼은 것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가까운 사이에서도 작은 일로 오해하고 고민할 수 있음을 담고 싶었다.

공무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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