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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배보다 배꼽이 더 큰 리필비용, ‘호환’이 답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재동의 남자도 쇼핑을 좋아해(21)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이것보다 더 완벽하게 들어맞는 표현이 있을까. 샀다고 끝이 아니었다. 공기청정기를 샀더니 1년에 두 번은 몇만 원짜리 필터를 사야 했고, 음파 진동 칫솔은 칫솔모에 기술이 집약된 모양인지 칫솔모 하나 가격에 기존 칫솔 스무 개는 넘게 살 수 있다. 그렇다고 안 살 수는 없다. 비싼 돈 주고 산 제품들인데 리필 때문에 묵혀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된 이상 계속 그 돈을 내고 쓸 수밖에 없다. 살 때는 몰랐는데, 마치 핸드폰 약정 같은 족쇄를 찬 것 같다.

나 같이 리필에 들이는 비용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중에 몇몇 선구자는 그것을 사업으로 만들었다. 제조사가 공식적으로 판매하는 리필제품은 아니지만, 모양과 기능이 비슷해 ‘호환’이 가능한 리필용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그런 제품들을 따로 지칭할 만한 단어는 없는 것 같아 그냥 ‘호환제품’이라고 칭하겠다. 이런 호환제품은 공식 리필제품보다 가격이 저렴한 건 물론이고 추가적인 기능을 가진 경우도 있다. 리필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겐 매우 감사할 만한 일이다. 이걸 만든 사람도 시작은 나 같은 생각이었을 텐데, 역시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처음으로 호환제품을 구매하게 된 계기는 공기청정기 필터 리필 때문이었다. 우리집 공기청정기는 심플한 디자인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중국제품이었는데, 재작년 미세먼지로 고생할 때 구매했다. 이거 하나면 이제 미세먼지 걱정은 끝났나 싶었는데, 안에 있는 필터를 주기적으로 갈아줘야 한단다. 필터를 닦아서 쓰려 했더니 그러면 필터가 망가져 공기청정기가 제 기능을 못 한다고 한다. 결국 필터를 사려고 알아보니 해외배송이라서 배송비도 들고 필터 가격도 비싼 편이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이걸 몇 개나 더 사야 하나 싶었다. 그러다 ‘호환’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포털에서 공기청정기 필터를 검색하면 호환제품이 더 많다. 사진은 포털 검색 화면 캡처.

포털에서 공기청정기 필터를 검색하면 호환제품이 더 많다. 사진은 포털 검색 화면 캡처.

포털에서 공기청정기 필터 검색을 하면 ‘공식’과 ‘호환’으로 나뉜다. 그런데 호환제품이 더 많다. 역시 대한민국 만세다. 심지어 공식 필터의 기능을 개선한 제품들도 있다. 그 제품으로 샀다. 다만 추천하기 조심스러운 것은 써보니 차이를 잘 모르겠다. 정품을 쓴다고 해서 더 좋거나 더 나쁘거나를 알 수가 없다. 애초에 스스로 공기의 질을 수치화할 수 있다면 나는 인간의 한계를 넘은 것이다. 그냥 호환필터를 써도 기계는 잘 돌아가는 것 같고, 악취 등의 큰 부작용이 없음에 만족할 뿐이다.

이렇게 호환제품에 눈을 뜨게 되어 집안의 다른 리필용품도 호환제품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다양한 제품이 많았는데, 음파 진동 칫솔도 그중 하나다. 치과를 두려워하는 나로서는 구매만족도가 매우 높은 제품이었는데, 단 하나의 단점이 칫솔모를 교체할 때 비용이 상당히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칫솔모 호환제품은 등급의 차이가 있는지 정품의 10%부터 50% 까지 제품별 가격 차이가 큰 편이었다. 싼 걸 사서 자주 교체하자는 마음으로 가장 저렴한 것을 샀는데, 기존 공식 리필제품과 차이가 나지 않았다. 치과의사 정도 되면 느낄 수 있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반인인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가족 모두 호환제품으로 교체했다.

쓰레기통도 리필이 필요했다. 딸이 태어난 후 기저귀 때문에 냄새 차단 및 편의성으로 유명 제품을 샀는데, 내부에 비닐이 설치되어 있어 그 비닐을 다 쓰면 새로 사야 했다. 아기의 기저귀는 엄청난 속도로 쌓여가고 비닐은 순식간에 동이 났는데, 그 비닐의 리필제품이 생각보다 비쌌다. 이것도 호환제품이 있었다. 직접 몸에 닿거나 건강 관련 제품도 아니다 보니 호환제품에 대한 심리적 장벽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판매하는 업체도 많은 편이었다. 이런 걸 보면 공식 판매몰에서는 가격의 불리함을 뛰어넘을 만한 강력한 차별성을 만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것 같다.

조금 다른 방향의 호환제품도 있다. 에스프레소 커피머신 캡슐인데, 보통 호환제품을 찾는 이유가 가격 때문이라면 커피 캡슐은 다양한 맛을 위해서다.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가 수유 때문에 디카페인 커피를 찾았는데, 종류가 많지 않았다. 호환제품을 찾다 보니 다양한 디카페인 제품을 구매할 수 있었다. 글로벌 커피 기업에서도 호환용 캡슐이 나온다. 에스프레소 기기를 플랫폼으로 다양한 취향을 확장하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에소프레소 추출기계의 캡슐도 다양한 호환제품이 있다. [사진 unsplash]

에소프레소 추출기계의 캡슐도 다양한 호환제품이 있다. [사진 unsplash]

내가 원하는 호환제품도 있다. 대용량 디퓨저 리필액이다. 디퓨저 리필액은 지금도 판매하고 있지만, 500mL 이하의 작은 용량 제품밖에 없다. 그때마다 구매하는 것도 귀찮고, 가격도 1.5L 이상의 대용량으로 저렴하게 판매하면 나처럼 찾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이 기회에 사업이나 해볼까? 안된다. 가장이 된 이후 난 평생 남의 밑에서 일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에서 써준다면 말이다. 내 생사여탈권이 남한테 있는 것이 바로 직장인의 비애다. 사업할 용기가 없으니 누군가 이걸 보고 만들어 팔아줬으면 좋겠다. 제일 먼저 구매할 것을 약속할 수 있다.

직장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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