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 중 상당수가 천국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천국 사람이라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을 때, 그걸 본 제자들도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말했다. 물 위를 걷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천국 사람임을 확인한 것이다.
성경에서 물 위를 걸은 사람은 예수뿐만이 아니다. 제자인 베드로도 물 위를 걸었다. 물론 계속 걷지는 못했다. 베드로는 잠시 걷다가 다시 물속에 쑥 빠져버렸다. 왜 그랬을까.
물 위를 걷는다는 건 단지 믿기 힘든 이적일 뿐일까. “성령의 힘”이라는 한 마디로 묻고 지나가야 하는 일일까. 아니면 그 속에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더 깊은 울림이 숨어 있는 걸까.
그래서 오늘은 ‘물 위를 걷는 예수와 물 속에 빠진 베드로’ 이야기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자율주행자동차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힘겹게 좌충우돌하며 수시로 접촉 사고가 생기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물 위를 걷던 베드로에게는 이런 자율주행자동차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정희윤 기자가 묻고, 백성호 종교전문기자가 답합니다.
- 인간의 삶에는 온갖 파도가 친다. 슬픔, 아픔, 고통, 불안 등. 그런 파도 속에 있으면서도, 파도에 젖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나.
- “성경에도 그 이야기가 있다. 갈릴리 바다에서 보여준 예수님 일화에는 ‘인생의 파도에 젖지 않는 비법’이 담겨 있다.”
-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 위를 걸은 이야기 말인가. 그런데 베드로는 조금 걷다가 물에 빠져버렸지 않나.
- “그렇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다시 물속에 빠졌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베드로의 손을 예수님이 ‘탁!’ 잡아주었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 뭐라고 했나.
-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했느냐!”
- 뭔가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앞뒤 자초지종을 설명해 달라.
- “제자들이 배를 타고 먼저 갈릴리 호수로 떠났다.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를 한 뒤 뒤늦게 내려왔다. 배는 이미 떠난 뒤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서 배를 향해 갔다. 그걸 본 제자들이 어땠겠나?”
- 내가 본 게 꿈인가, 생시인가. 그러면서 눈을 비볐을 것 같다.
- “맞다. ‘유령이다! 유령이 나타났다!’ 깜짝 놀라서 이렇게 소리쳤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누군가. 예수님이다. 그걸 보자 베드로가 마음이 동했다.”
- 어떻게 동했나?
- “나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어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한 거다.”
-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나?
-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오너라!’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거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하나가 되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너라!’ 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보여준 태도에 주목한다.”
- 베드로가 어떻게 했나?
- “베드로는 어부였지만 바다에서 살아남을 만큼 수영을 잘하진 못했다. 구명 조끼를 입은 것도 아니었다.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배에서 바다로 내려갔다. 물 위에 두 발을 디뎠다. 우리라면 어떻게 했겠나?”
- 우선 한쪽 발만 물에 담갔을 것 같다. 나머지 한 손은 배의 난간을 붙들고 있으면서. 왜냐하면 두 발을 다 넣었다가 안 서면 어떡하나. 그럼 바다 속으로 쑥 빠져버리는 것 아닌가.
- “맞다. 대부분 사람이 그렇게 하지 싶다. 그런데 베드로는 달랐다. 그는 두 손을 다 떼고, 두 발을 다 바다 위에 디뎠다.”
- 그게 뜻하는 바가 있나?
- “100% 맡기는 거다. 100% 믿을 때 100% 맡기는 게 가능하다. 기독교에서는 그걸 ‘Total commitment(토털 커밋먼트)’라고 부른다. 우리말로 하면 ‘전적인 위탁’이다.”
- 전적인 위탁. 전적으로 맡긴다는 뜻이다. 비유하자면 일종의 완전자율주행자동차 같은 건가. 테슬라처럼 그냥 차가 알아서 주행하게끔 운전자가 맡기는 건가.
- “그렇다. 테슬라도 아직은 2.5단계 수준이다. 그런데 완전자율주행자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나는 믿질 못하겠어. 30%, 아니면 40%만 믿어. 그럼 어떡하겠나. 운전하다가 내가 자꾸 개입하게 된다. 가령 서울에서 강릉까지 가다가, 어? 공사중이다. 차선이 줄어든다. 그런데 차의 속도가 너무 빨라. 왠지 불안해. 못 믿겠어. 그럼 어떡하나? 내가 개입한다. 브레이크를 밟는다. 내가 핸들을 잡고 돌린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런 거다.”
- 그럼 베드로는 100% 완전자율주행에 자신을 맡긴 건가. 예수님에게 모든 걸 맡긴 건가. 그래서 바다 위로 내려온 건가.
- “그렇다. 그래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시작한 거다. 한 발, 또 한 발. 예수님께 다가간 거다. 무엇을 위해서? 예수 안에 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 그런데 베드로는 갑자기 바다에 빠져버렸다. 물 위를 계속 걷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가?
- “성경에 그 이유도 기록돼 있다.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갈 수도 있는 대목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며 예수님을 향해서 다가갈 때, 멀리서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걸 본 베드로는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돼 있다. 왜 두려워졌겠나?”
- 바다 위에 있는데, 돌풍이 오면 죽을 수도 있지 않나. 물에 빠져 죽을까봐 두려워진 것 아닌가?
- “맞다. 내가 죽을까봐 두려워진 거다. 무서워진 거다. 그 순간, ‘예수’라는 자율주행자동차에 대한 믿음이 30%로 쪼그라든 거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손으로 핸들을 ‘탁!’ 잡은 거다. 다름 아닌 ‘에고의 운전대’다.”
- 그래서 물속으로 쑥 빠져버린 건가.
- “그렇다. 물속에 빠진 베드로는 허우적대면서 소리쳤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 뜻밖이다. 이런 메시지가 담겨 있는 줄은 몰랐다.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은 게 사실인가, 아닌가. 그게 성령의 힘인가, 아니면 비유적 표현인가. 그것만 따지지 않나. 그런데 이렇게 깊은 울림이 담겨 있는 줄은 몰랐다.
- “물 위를 걷는 기적이 예수님의 초능력이라고 한들, 내지는 초능력이 아니라고 한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게 내 삶의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그걸 짚어봐야 한다. 그래야 성경 속 모든 일화가 내 안에서 되살아날 수 있지 않나.”
- 그럼 물 위를 걷는 베드로가 주는 메시지는 뭔가.
- “너의 고집으로 똘똘 뭉친 ’에고의 운전대‘를 한 번 내려놓아봐라. 그럼 우주의 운전대가 드러날 거다. 겁내지 말고 맡겨봐라. 이 거대한 우주의 운전대에 네 삶의 핸들을 맡겨 봐라. 그럼 네 삶이 파도 속에 있으면서도, 파도에 젖지 않게 될 거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처럼 말이다. 이런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본다.”
하루하루 겁나는 일도 많고, 걱정 근심도 참 많습니다. 오늘부터 우주의 운전대에 저를 맡기는 연습을 해봐야겠네요. 다음 편에서는 불교의 선문답 일화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알쏭달쏭 수수께끼로만 보이는 선문답 일화에도 우리의 가슴을 흠뻑 적시는 소나기가 숨어 있으니까요.
백성호 종교전문기자ㆍ정희윤 기자 vangog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