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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삶을 살맛나게 하는 별것 아닌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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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주말 아침, 무심코 TV를 켜니 미국 프로농구 동부리그 플레이오프 준결승 최종전이 진행 중이다. 경기 종료를 불과 3분여 남겨놓은 상황에서 전년도 챔피언 토론토 랩터스가 보스턴 셀틱스에 뒤지고 있다. 셀틱스는 공격 제한 시간 24초를 최대한 활용하려 애쓰고 랩터스는 계속 파울을 범해 자유투를 내준다. 그로 인한 자유투 두 개 중 하나라도 실패한다면 한 점을 덜 내어줄 것이고, 둘 다 성공해 두 점을 내준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공격권을 가져오니 랩터스 입장에서는 밑져야 본전이다. 그것을 파울 작전이라고 한단다. 그러다 주전 선수 한 명이 퇴장당한다. 여섯 번째 반칙을 범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자유투도 내준다. 랩터스가 4쿼터에서만 여섯 개의 파울을 범해 팀 파울에 걸렸기 때문이다.

소소한 앎을 통한 소소한 즐거움 #아는 만큼 즐기는 스포츠와 예술 #모르는 게 약이 아니라 아는 게 힘

이제 역전할 가능성은 골대로부터 7.24m 거리에 그어진 반원 밖에서 던지는 3점 슛을 성공시키고 연장전에 돌입하는 방법밖에 없다. 공격권을 가진 상황에서 종료 몇 초 전 랩터스 감독이 작전 타임을 요청한다. 딱히 선수들에게 전할 말도 없지만, 그 작전 타임으로 랩터스는 자기 진영 골대에서 중앙선까지 진격하는 데 필요한 몇 초를 아낀다. 작전 타임 후의 경기 재개 지점은 중앙선이기 때문이다.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당 종목의 경기 규칙을 훤히 꿰어야 한다. 농구의 공격 제한 시간은 몇 초이며, 자유투를 내주는 경우는 무엇 무엇이고, 어떠한 행동이 파울에 해당하고 개인 파울과 팀 파울은 무엇인지 등. 그래서 ‘군대스리가’를 경험한 대한민국 성인 남성은 축구 경기를 보며 감독급의 해설과 함께 흥분하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러니 프리미어 리그나 분데스리가와 함께 행복한 주말 저녁을 보내고 싶은 남편들은 아내에게 축구 규칙부터 자상하게 설명하고 볼 일이다.

스페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1599~1660)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이 있다. 다섯 살짜리 공주 마거릿 테레사를 단장하는 시녀들과 이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왕 필립 4세와 왕비 마리아나, 그리고 화폭 앞에 선 벨라스케스 자신까지 11명의 인물과 한 마리 애완견이 담긴 다소 번잡스러운 그림이다. 이 그림 속의 다양한 인물이 실제 누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공주를 단장하는 분주한 상황에 덧붙여 화가 자신까지 화폭에 넣음으로써 벨라스케스는 이를 한장의 스냅사진처럼 그렸다. 공주 뒤편 거울 속에 비친 왕과 왕비는  공간적으로 이 그림 밖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벨라스케스가 그리고 있는 대상이 공주인지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인지 불분명하다.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가 공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초상화의 모델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말해 그림 속에 뒷면을 드러내고 있는 이젤에 담긴 대상이 공주인지 왕과 왕비인지 알 길이 없다. 이렇게 ‘별것 아닌 궁금증’을 여럿 자아내니 피카소가 이를 자신의 양식으로 변형한 작품을 자그마치 58개나 남겼을 만큼 이 그림은 서양 미술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렇게 스포츠는 규칙을 앎에서, 구상화는 대상이 표현된 상태를 살피는 데서, 추상화나 음악은 작품에 담긴 현상의 상호관계를 파악하는 데서 즐거움이 시작된다. 스포츠건, 예술이건, 그로부터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려면 우선 그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앎’이 필요하다. 그 앎은 규칙이나 이론처럼 숙지해야 하는 것과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나뉜다. 음악 애호가 한 분이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고전음악과 가까워질 수 있는지’ 묻는 동료에게 이렇게 답하는 것을 들었다. ‘한 곡을 거의 다 외울 수 있을 때까지 들어라. 그러면 무언가 들린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른 것을 들어도 흥미로운 많은 것이 들린다.’ 음악을 업으로 삼은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막힌 방법이다.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이윤 획득에 딱히 보탬이 되지 않는 ‘알(아 두면) 쓸(데 없는) 잡(지식, 경험)’이야말로 우리네 삶을 삶답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린다. 앎이 늘어나는 만큼 누릴 것이 늘어난다. 그러니 아무리 잡다하고 소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모르는 것이 약’이 아니라 ‘아는 것이 힘’이다.

식탁에 놓인 접시로 스리쿠션 각도를 어림잡건, 엘리베이터 앞에서 긴 우산을 두 손 모아 잡고 엉덩이를 씰룩거리건, 주말에 젖은 낙엽처럼 소파에 찰싹 붙어 스포츠 채널과 함께하건, 화집을 펼치거나 음악을 틀건, 그 모든 비생산적 즐거움은 한 주 내 힘껏 일한 우리가 누려 마땅한 소박한 선물이다. 그리고 그 선물의 가치는 그에 대한 소소한 앎에 비례한다.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