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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라오스 시골마을서 영어 가르치는 게 행복한 아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배은희의 색다른 동거(31)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이면 친정 어머니는 부침개를 부치셨다. 달궈진 팬에 기름을 두르고 반죽을 한 국자 떠 넣으면, 주방 가득 촤르르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옆에 있던 내 입에도 금세 침이 고였다.

“은희야, 이거 ○○네 갖다 주고 와라.” 어머니는 음식을 하면 꼭 이웃들과 나누셨다. 음식은 뜨끈할 때 먹어야 제맛이라고 심부름을 재촉하셨다. 어린 마음에 ‘이렇게 맛있는 걸 다 나눠주면, 우린 어떡하나’ 걱정이 됐다.

어머니는 텃밭에 심은 고추, 상추, 깻잎까지 즐겁게 나누셨고 나는 그걸 보며 자랐다. 진심으로 나누면 행복했고, 나눈 것보다 더 많은 걸 받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나눔의 법칙’이었다.

어머니는 음식을 하면 꼭 이웃들과 나누셨다. 나는 그걸 보며 자랐고 자연스럽게 나눔을 배웠다. 팔순의 어머니는 혼자 사시면서도, 여전히 이웃들과 나누며 사신다. [사진 배은희]

어머니는 음식을 하면 꼭 이웃들과 나누셨다. 나는 그걸 보며 자랐고 자연스럽게 나눔을 배웠다. 팔순의 어머니는 혼자 사시면서도, 여전히 이웃들과 나누며 사신다. [사진 배은희]

20대엔 큰 가방 하나를 챙겨 지적장애 시설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네가 왜 그런 데 들어가냐?”, “실연 당했냐?”며 만류하셨다. 나눔이 일상이었던 어머니도 딸이 고생하는 건 차마 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자그마한 방에 열다섯 명의 원생이 모여 살았는데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이면 방안에 빨랫줄을 걸고 남루한 옷가지을 겹겹이 널었다.

명절 당일이면 눅눅한 고요는 곰팡이처럼 피어났다. 명절 전에는 손님도 많이 오고, 선물도 많이 받았지만 정작 명절 당일은 하루 종일 조용했다. 원생들은 텔레비전 앞에서 슬프도록 고요한 명절을 보냈다.

세월이 흐르고, 시설에서 퇴사한 다음 결혼을 했다. 두 아이를 낳고 바다 건너 제주도로 이사를 했다. 우연한 기회에 독서 치료 수업을 맡게 됐는데, 그때 제주보육원 아이들을 만났다.

고맙게도 나를 잘 따라줬다.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보육원을 퇴소하고도 계속 연락해 왔다. 사회복지 시설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나는 명절 전날이면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같이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고 기름진 수다를 떨었다.

“선생님, 난 아이 낳으면 선생님한테 책 수업 받게 할 거예요.” 대학에 합격했다며 작은 케이크를 사 온 녀석이 피식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녀석은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도, 첫 월급을 받았을 때도 내게 연락을 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가슴이 아리도록 고맙고, 또 고마웠다.

우리 집 두 아이는 어려서부터 보육원 친구들이랑 자연스럽게 어울려 지냈다. 처음엔 보육원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고는 ‘평범한 집에서 사는 게 감사하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첫째 휘성이는 라오스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지낸다. 그게 행복하단다. 친정어머니의 나눔이 나에게서 아이들에게로 전해진 걸 보면 가장 강력한 교육은 '부모의 삶'이다.

첫째 휘성이는 라오스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지낸다. 그게 행복하단다. 친정어머니의 나눔이 나에게서 아이들에게로 전해진 걸 보면 가장 강력한 교육은 '부모의 삶'이다.

위탁가족이 된 것도 두 아이의 동의 때문이었다. 가정위탁제도는 온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할 수 없다. 그런데 휘성이, 어진이 모두 은지가 우리 가족이 되는 게 오히려 기대된다고 했다.

은지랑 놀아주고, 분유를 먹여주고, 아장아장 걸음마 연습을 시켜주며 육아에 동참해 줬다. 그림책을 읽어주고, 청소와 설거지를 해줬다. 두 아이가 함께하지 않았다면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친정어머니의 나눔이 나에게서 아이에게로 전해진 걸 보면, 가장 강력한 교육은 ‘부모의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 순간 나를 단련시키고, 가다듬는 이유이기도 하다.

휘성이(첫째)는 미국으로 가려던 계획을 부침개처럼 뒤집고 라오스로 갔다. 라오스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게 행복하단다. 어진이(둘째)는 국제외교에 관심을 갖다가 지금은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검정고시 학생의 멘토로 활동하고 있다.

두 아이를 보면 ‘친정어머니 마음이 이랬을까’ 싶다. 내가 힘든 건 괜찮은데 자식들이 힘든 건, 뜨거운 팬 위에서 지글지글 지져지는 심정이다. ‘이렇게 어른이 돼가는 걸까’ 이성적으론 옳은 일이지만 꼭 우리 아이들이 해야 하는지 여러 번 되물었었다.

여전히 화끈거리고 아리지만, 그때마다 되뇌는 건 “이게 큰사람이지”, “이게 사랑이지”하는 믿음이다. 나눈 것보다 받는 게 더 많았던 어린 날의 기억을 회상하며,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나눔의 법칙’을 기억한다. 나를 다독이면서.

위탁부모·시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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