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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과 무명 의미 없죠" 배우 박호산이 그날 맨홀에서 본 것은

중앙일보

입력

배우 박호산을 지난 7월 23일 단편 '맨홀통신' 대본 리딩이 있던 서울 마포구 서교동 까페 타임레서피에서 만났다. 작품이 아니면 메이크업은 하지 않는다는 그는 자연스런 맨얼굴로 소탈하게 웃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배우 박호산을 지난 7월 23일 단편 '맨홀통신' 대본 리딩이 있던 서울 마포구 서교동 까페 타임레서피에서 만났다. 작품이 아니면 메이크업은 하지 않는다는 그는 자연스런 맨얼굴로 소탈하게 웃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 꿈이죠. 그걸 포기하면 마치 인간성이 없어진 기분이죠. 꿈은 나이하곤 관계없는 것 같아요.”

tvN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나의 아저씨’로 20여년 무명을 떨치고(데뷔작은 1996년 뮤지컬 ‘겨울나그네’) TV‧무대‧스크린을 쉼 없이 넘나들며 다작을 펼쳐온 배우 박호산(48)이 초저예산 단편영화 주연 나섰다. 코로나19 속에 15일 온라인 개막하는 제12회 서울국제초단편영화제(이하 초단편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된 단편 ‘맨홀통신’(감독 장재원)이다. 초단편영화제가 매해 재능기부에 나선 배우를 주연으로 신인감독 단편 시나리오를 공모, 제작 지원하는 프로젝트 ‘E-CUT 감독을 위하여’ 일환이다.

15일 개막 제12회 서울국제초단편영화제 #신인감독 개막작 '맨홀통신' 재능기부 주연

배우 안재홍이 연출·각본 겸한 단편도 출연

올 들어 그가 선보인 출연작은 뮤지컬 ‘빅 피쉬’,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인간수업’, MBC 드라마 ‘저녁 같이 드실래요’, 영화 ‘죽도 서핑 다이어리’ 등 4편이다. 코로나19로 개봉이 연기된 박신혜 주연 스릴러 ‘콜’도 기다린다. 그런데도 출연료 없이 재능 기부하는 이번 작품에 오히려 들뜬 기색이었다. 첫 대본 리딩이 있던 지난 7월 23일 서울 서교동에서 만난 그는 “(단편이) 오랜만도 아니다. 얼마 전에도 안재홍 감독이 감독‧각본‧주연하는 단편에 ‘형도 좀 해줘’ 하기에 1박 2일 찍고 왔다”면서 “원래 이런 실험적인 작품을 좋아한다”고 귀띔했다.

박호산(오른쪽)이 재능기부로 주연을 맡은 단편 '맨홀통신' 장면들. 중년 남자 준호(박호산)가 한낮에 맨홀을 들여다보는 한 소녀를 만나며 겪는 이야기다. 맨 아래는 촬영 현장 모습. [사진 라이트하우스

박호산(오른쪽)이 재능기부로 주연을 맡은 단편 '맨홀통신' 장면들. 중년 남자 준호(박호산)가 한낮에 맨홀을 들여다보는 한 소녀를 만나며 겪는 이야기다. 맨 아래는 촬영 현장 모습. [사진 라이트하우스

신인감독들이 오직 박호산만을 위해 쓴 여러 시나리오 중 그 자신이 직접 택한 작품이 ‘맨홀통신’이다. 평소 친한 정윤철 감독 소개로 이 프로젝트를 알게 됐다는 그는 “단편 쪽 훌륭한 감독들과 단편이 좀 뜸해진 배우들을 연결시켜 서로 윈윈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면서 “‘맨홀통신’은 단편답고 간단하면서도 ‘땡~!’ 울릴 수 있는 작품이었다. 굉장히 일상적인 연기톤이어야 하고 이런 거야 말로 좀 경력 있는 배우들이 해주면 좋겠구나, 생각해서 택했다”고 돌이켰다.

독립영화 '족구왕'의 선물…'슬빵'이 아빠죠 

그는 ‘맨홀통신’에 대해 “지나가버린 사람들, 기억들에 대해 자유롭게 마치 대화하는 듯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중년의 준호가 길 한복판에서 맨홀을 들여다보는 한 소녀를 만나면서 뜻밖의 감정을 겪는 여정을 상영시간 11분여에 담아냈다. 20일까지 엿새간 초단편영화제 온라인 상영관 ‘유업(YouUpp)’에서 볼 수 있다. 각본을 겸한 장재원 감독은 “박호산 배우가 다방면 연기 경험이 많기에 뭘 써도 잘해주시겠다, 싶어 편하게 썼다”고 했다.

박호산(오른쪽)의 드라마 출세작 '슬기로운 감빵생활'. 극 중 콤비인 해롱이 역 이규형(왼쪽)과는 드라마 직전 2인극 '도둑맞은 책'을 3개월간 공연하며 호흡이 물 오른 상태로 드라마에서 재회한 게 운이 좋았다고 그는 말했다. [사진 tvN]

박호산(오른쪽)의 드라마 출세작 '슬기로운 감빵생활'. 극 중 콤비인 해롱이 역 이규형(왼쪽)과는 드라마 직전 2인극 '도둑맞은 책'을 3개월간 공연하며 호흡이 물 오른 상태로 드라마에서 재회한 게 운이 좋았다고 그는 말했다. [사진 tvN]

장 감독이 가장 인상 깊었다는 박호산의 출연작은 족구 고수 복학생을 맛깔나게 소화한 독립영화 ‘족구왕’(2014). 유행지난 족구를 꿈꾸는 대학생들의 코믹 판타지 청춘영화로 독립영화상을 휩쓸며 5만 가까운 관객을 모았던 작품이다. 박호산 자신도 “영화‧방송계 ‘선수’들이 이상하게 그 영화를 좋아하더라. 그 영화가 내게 첫 드라마(SBS ‘원티드’)를 선물했다” 말한 작품이다. “방송하겠다고 한 4년 오디션 문을 두드렸는데 연극 오래하고 어쩌고 난 잘 모르겠다던 반응들이 ‘어, ‘족구왕’!’으로 바뀌었다”면서다. “조금 더 얼굴이 알려질 무렵 ‘슬기로운 감빵생활(이하 슬빵)’이 저를 대중적으로 태어나게 해줬어요. ‘슬빵’이 아빠고 ‘나의 아저씨’가 엄마죠.”

유명과 무명은 의미 없어…새 시도 많아지길

1996년 뮤지컬 ‘겨울 나그네’로 데뷔 후 지금껏 그가 무대에 선 작품은 300편이 넘는다. 뮤지컬 ‘빨래’ ‘형제는 용감했다’ ‘광화문 연가’ 등과 연극 ‘철수와 만수’ ‘광해’ ‘품바’ ‘춘천 거기’ 등이다. 영화 ‘왕의 남자’ 토대가 된 연극 ‘이’에도 출연했다. 스물셋에 결혼해 일찍 아버지가 되고 출연료론 생계가 안 돼 지게차 운전, 고층빌딩 유리 닦기 등 안 해본 ‘알바’ 없이 쫓기듯 살았던 시절, 그를 버티게 한 힘은 “작품”이었다. “유명과 무명은 별로 의미 없다”며 당시를 ‘황금기’라 말했다. “정말 좋은 작품을 많이 만났고 제일 많이 늘었던 시기 같다”고 했다.

박호산은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꿈"을 꼽았다. "그게 없으면 인간성이 없어진 기분"이라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호산은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꿈"을 꼽았다. "그게 없으면 인간성이 없어진 기분"이라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단편영화로 돌아간 이유도 다르지 않다. “리프레시가 되죠. 물론 저예산이니까 갖춰진 여건이 그렇게 좋을 순 없지만 그렇다고 작업하는 사람들이 훌륭하지 않거나 실력 없는 건 아니잖아요. 넷플릭스를 보면 굉장히 다른 길이의 좋은 작품이 많은데, 우리나라 영화는 대개 극장 상영시간 맞춰서 120분, 이렇게 가니까 조금 답답함이 있어요. 다양한 것들이 나타나야 기존의 것들도 발전할 거라고 생각해요. 또 배우로서는 조금 더 참여적인 작업이죠. 기존 상업영화 틀에서 주어진 역할이 아니라 규모가 작다보면 서로 밀접해지고 같이 회의하고, 저처럼 영화에서 아직 조연인 입장에선 작품 전체를 책임지는 비중 있는 역할을 연습한다고 해야 할까요. 연극 쪽도 이런 시도가 많아지면 좋겠어요.”

배우는 이해하는 사람, 더 많은 책임 지고싶죠

제54회 백상예술대상에서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로 TV부문 남자조연상을 받은 박호산. [중앙포토]

제54회 백상예술대상에서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로 TV부문 남자조연상을 받은 박호산. [중앙포토]

요즘 그는 강원도 양양에서 서핑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아들 3형제 중 ‘고등래퍼’ 출신인 둘째 박준호가 최근 낸 2집 랩을 들으며 “아 드디어 얘가 좀 시를 쓰는구나” 감탄도 한단다. 연극배우 할 때와 가장 달라진 것으론 “아직 빚은 갚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가족들이 조금은 편해진 것, 알아봐주는 사람이 많아진 것”을 들었다. “제가 생각하는 연기자는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해하는 사람이거든요. 작품마다 친구를 하나 만들고 그 친구를 이해하고 깊게 내려가서 내가 가져가면 보는 사람들이 그 친구를 보죠, 나를 통해서.”

배우로서 새로운 꿈은 “작품에 좀 더 많은 책임을 지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비중에 좀 목말라 있어요. 물론 좋은 작품이 제일 좋고요. 과연 내가 준비돼있나, 이런 생각도 물론 하고요. 좋은 이야기에 조금 더 쓰임 받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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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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