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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갤러리를 털어라'…코로나 시대 방구석 추억 여행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61)

‘하드를 털어라!’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부쩍 등장하는 말이다. 더불어 갤러리도 털라며 부추긴다. 솜씨 좋은(?) 도둑이 등장하는 영화 이야기도 아니고 대체 뭘 털라는 걸까?

휴대폰 사진을 들춰보다 그려본 파리근교 모네의 집〈모네의 창가에서〉. 갤럭시탭s6 [그림 홍미옥]

휴대폰 사진을 들춰보다 그려본 파리근교 모네의 집〈모네의 창가에서〉. 갤럭시탭s6 [그림 홍미옥]


요샌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 같은 오버 더 톱 서비스(OTT)를 통해 최신영화나 세계 각국의 콘텐츠를 볼 수 있다. 하기는 코로나 시대엔 선뜻 영화관엘 가는 것도 고민이 필요하겠다. 이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안방에서 지구촌 콘텐트를 즐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어둠 속에서 핸드폰이나 태블릿을 보면 눈에는 치명적이라는 걸 모르진 않지만, 오늘도 잠들기 전 영화 한 편을 골랐다.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의 ‘용의자 X의 헌신’이다. 물론 추리 애호가인 나는 한·중·일 버전을 이미 보았던 터다. 하지만 영화고 책이고 이른바 ‘곱씹는 재미’는 최고다. 부쩍 서늘해진 밤, 영화 한 편과 잠드는 밤은 제법 낭만적이기도 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잘생기고 멋진 배우 말고도 눈에 들어오는 몇몇 장면이 있었다. 톱니바퀴처럼 나름의 규칙이 있다던 노숙자와 그들의 거처인 커다란 교각이다.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의 배경이 된 도쿄 신오하시다리 밑. [사진 홍미옥]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의 배경이 된 도쿄 신오하시다리 밑. [사진 홍미옥]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이던가 영화 ‘용의자 X의 헌신’ 배경을 찾아 추운 겨울에 떠난 여행이 생각났다. 가히 천재로 불릴만한 두 주인공이 걷던 노숙자로 가득했던 다리 밑, 여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오가던 신오하시다리의 거센 바람도 떠오른다. 이때다 싶어 휴대폰 사진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컴퓨터는 아니지만 나도 ‘하드를 털어라’ 대열에 합류하는 셈인가? 이쯤이면 잠은 다 잤다.

추억과 말걸기 

〈구라시키의 뱃놀이〉. 갤럭시노트5 S노트. [그림 홍미옥]

〈구라시키의 뱃놀이〉. 갤럭시노트5 S노트. [그림 홍미옥]

휴대폰 사진갤러리엔 추억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얼굴을 때리던 찬바람 가득했던 영화 속 장소와 함께 그날의 기분까지도 함께였다. 스크롤을 내리자 더 많은 추억과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어쩌면 딱 이맘 때였을 9월의 어느 날엔 뱃놀이하는 무리를 보면서 손을 흔들기도 했다. 미처 배표를 구하지 못해 아쉬웠던 기분도 함께 떠올랐다.

요즘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 등 SNS에는 유난히 지난 여행기가 자주 올라온다. 당분간은 여행이 꿈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보니 너도나도 추억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말 그대로 ‘하드를 털어라’다. 분명 한 번쯤 읽었음직한 글들이지만 웬걸? 새롭기만 하다. 기억이라는 ‘하드’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이 슬금슬금 말을 걸기 시작하는 것이다.

누구는 그다지 즐겁지 않았던 여행이 이제 보니 나름 좋았었다고 반성 섞인 소회를 털어놓는다. 또 누구는 다음엔 이러이러한 곳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겠노라며 미리 다짐하곤 한다. 더불어 공통적인 감상이 하나 더 있다. 그때가 좋았다느니 혹은 좋을 것도 없던 일상이 알고 보니 최고였다는 고백이다.

예전에 그려두었던 여행지에서의 그림을 손보기 시작했다. 선을 하나 그을 때마다 색을 채워 넣을 때마다 그곳에서의 바람도 향기도 함께 날아오는 듯했다. 사소한 일상이 주는 즐거움이 이렇게 소중하게 느껴질 줄은 나 역시 알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라는 사태는 우리에게 많은 걸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작은 것의 소중함, 평범함의 위대함, 자연에의 경외심과 더불어 욕심에 대한 반성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지금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시간도 여전히 소중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여행은 짐 가방을 꾸리면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고. 꿈을 꾸는 순간 시작이라고. 꼭 어디로 떠나는 게 아닌 일상으로 다시 들어가는 여행이 되는 꿈! 꿈은 이루어진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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