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잘 나가는 드라마 남자주인공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tvN 토일드라마 ‘비밀의 숲2’의 황시목 검사(조승우)를 비롯해 tvN 수목드라마 ‘악의 꽃’의 금속공예가 도현수(이준기), SBS 금토드라마 ‘앨리스’의 박진겸 형사(주원)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이유로 감정을 상실하게 됐다. 각각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들은 굿데이터코퍼레이션 드라마 부문 화제성 조사 결과 역시 1, 3, 5위에 오르는 등 시청자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비밀의숲·악의꽃·앨리스의 공통점 #뇌섬엽 절제술로 공감 어려운 황시목부터 #방사능 인한 무감정증, 후천적 사이코패스 #다양한 정신질환 등장해 극적 긴장남 높여 #감정과잉 반작용, 대리만족 느낀단 분석도
“언제나 예외인 황시목에게 공정함 기대”
해당 유형의 선두 주자는 ‘비밀의 숲2’의 황시목 검사다. 2017년 검찰 스폰서 살인사건을 다룬 시즌 1 방영 당시 어린 시절 외부세계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뇌섬엽이 지나치게 발달해 아주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전사가 드러난 바 있다.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뇌섬엽 절제술을 하고 그 후유증으로 외부세계와 공감을 결정짓는 통로가 막혀버렸다는 캐릭터 설정은 시즌 2 검경수사권 갈등으로 넘어와서도 꽤 유용한 장치로 사용된다. 검찰 외부는 물론 내부에 숨어있는 적을 상대하는 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탓이다.
스튜디오드래곤 안창호 프로듀서는 “‘모든 시작은 밥 한 끼다’라는 대사처럼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 관계가 얽히기 마련인데 황시목은 유일하게 예외가 적용되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밥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고 인정 없다고 핀잔을 들어도 스스로 무안해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도 쏠리지 않는 공정함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승우는 시종일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하다가도 새로운 단서를 발견할 때면 미묘하게 표정 변화가 일어나면서 극 전체를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감정 휘둘리지 않고 냉정한 수사 가능해”
주인공의 ‘감정 없음’은 극적 긴장감을 불어넣는 데도 효과적이다. 시간여행을 다룬 ‘앨리스’에서 엄마 배 속에 있을 당시 방사능 웜홀을 통과한 박진겸은 6살 때 무감정증 진단을 받는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공감해본 적이 없지만 유일한 가족인 엄마가 살해되자 범인을 잡기 위해 경찰이 된다. 제작진은 “무감정증이기 때문에 좀 더 냉철하게 범인을 쫓을 수 있고 엄마 박선영과 똑같이 생긴 윤태이로 인해 서서히 감정의 변화가 생겨난다. 그 과정을 통해 SF나 판타지 외에도 휴먼드라마 요소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악의 꽃’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는 케이스다. 극 중 도현수는 연쇄살인마의 아들로서 어릴 적부터 손가락질받으며 살아왔다. 아버지가 자살 후 “아들이 범행을 몰랐을 리 없다. 함께 한 공범일 것”이라거나 “너도 아버지와 똑같은 사이코패스” 같은 마을 사람들의 광기 어린 비난을 받아내면서 스스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 규정짓고 누나의 살인죄까지 대신 뒤집어쓴 후 백희성이라는 타인의 신분으로 살아간다. 형사인 아내나 6살 짜리 딸을 끔찍이 아끼는 모습을 보면 도무지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지만 후천적으로 뒤집어쓴 굴레에 자신을 가둔 셈이다.
“사이코패스는 살인마? 편견 부수는 효과”
스튜디오드래곤 장신애 프로듀서는 “기존 장르물에서는 범인을 찾고 보니 연쇄살인마나 사이코패스였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악의 꽃’은 처음부터 이 같은 설정을 전면에 내세웠다. 모두가 편견을 가지고 보기 시작하지만, 도현수가 누구보다 타인의 감정을 헤아릴 줄 알았다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함께 편견을 부숴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겉보기엔 멀쩡한 사회지도층처럼 보이는 백만우 병원장이 가족의 잘못을 덮고자 일을 꾸미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장 프로듀서는 “평범함의 기준은 지극히 개인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판단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내가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 각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tvN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반사회적 인격 성향을 가진 고문영(서예지), JTBC ‘이태원 클라쓰’의 소시오패스 조이서(김다미) 등 독특한 정신 절환을 가진 캐릭터도 부쩍 많아졌다. 『어쩌다 정신과 의사』를 쓴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자신의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감정 불능증이나 타인과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반사회적 성격 등은 사고나 수술 외에도 다양한 요인으로 생겨날 수 있다”며 “최근 들어 관련 환자가 더 늘어났다기보다는 미디어에 다양한 방식으로 노출되면서 관심이나 인지도가 높아진 것 같다”고 밝혔다. 해당 캐릭터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에 대해서는 “실제 질환이 아닌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하는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도 많은데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고통 극대화된 상황서 객관적 거리 두기”
감정 과잉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충남대 국문과 윤석진 교수는 “요즘은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도처에서 각자 주장을 펼치며 자기 논리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아 차분하게 현실을 직시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각 인물이 처해있는 고통이 극대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객관적 거리 두기가 가능한 동시에 캐릭터의 변별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 다만 “‘비밀의 숲2’은 조직 논리에 지나치게 함몰되면서 각각의 캐릭터가 지닌 개성이 사라졌다”여 아쉬움을 표했다. 스튜디오드래곤 유상원 CP는 “시즌 1과 시즌 2의 캐릭터가 달라졌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야기 전개 방식의 차이일 뿐 본질은 그대로다. 초반에 깔아놓은 안개가 걷히면서 다시 시작되는 이들의 활약을 기대해달라”고 밝혔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