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전지영의 세계의 특별한 식탁(34)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필리핀을 방문했다. 필리핀 일로일로 섬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를 찾아뵙고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대학생 10명이 한 팀이 되어 단기선교를 떠났다. 덥고 습한 날씨에 쉽게 지치기도 했지만 이런 필리핀의 날씨가 만들어낸 망고와 바나나, 파인애플은 정말 당도가 높고 종류도 다양했다.
특히 바나나는 우리가 흔하게 먹는 노란 바나나 말고도 그린 바나나, 몽키 바나나 등 종류도 많을 뿐 아니라 그냥 과일로 먹기도 하고, 굽고 튀겨 다양하게 조리해 먹고 있었다.
필리핀 음식은 말레이시아·중국·스페인·미국 요리의 매력이 혼합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동남아 요리처럼 복잡성이나 세련된 면이 좀 부족하기도 하지만 돼지고기를 훈제한 이탁(Etag)이나 새끼돼지 바비큐 요리인 레촌(Lechon)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자연적인 풍미가 살아있는 독특한 음식이다.
필리핀의 음식은 화려한 장식이나 조미료를 사용하기보다는 천연 향과 단순한 조리방식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많다. 잔치 음식으로 접대해준 이탁과 닭고기를 넣고 끓여준 국물 요리와 통돼지 바비큐 구이 레촌은 인상적이었다.
필리핀식 훈제 돼지고기 ‘이탁‘
이탁은 덥고 습한 필리핀에서 장기간 보관한 돼지고기를 먹기 위한 조리법이다. 참나무 연기에 보름 이상 말려 만드는데 소금에 절여 훈제하거나 숯불 훈제 방식으로 만들어 먹는다. 예전에는 직접 집에서 말려 먹었지만, 지금은 시장 전문점에서 사서 조리해 먹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탁을 큼직하게 숭숭 썰어서 닭고기와 함께 끓이면 푸짐한 손님 접대 음식으로도 손색이 없다. 차요테 (CHAYOTE)라는 채소를 넣고 볶아 먹기도 하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토마토와 곁들여 먹기도 한다. 필리핀 사람들도 주식으로 쌀을 많이 먹는데 우리가 먹는 쌀처럼 찰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찰기라 없는 쌀을 즐겨 먹는다.
필리핀식 쌀밥과 이탁, 각종 야채와 토마토를 곁들이면 훌륭한 접대 음식이 된다. 이런 이탁은 ‘이탁 축제’를 통해 많이 알려지게 됐다. 필리핀의 이탁 축제는 코르디에나 이고롯족의 여러 전통춤의 축제로, 19개 마을에서 서로 다른 전통춤을 선보인다. 필리핀의 전통악기를 치며 바구니에 이탁을 넣어 머리에 이고 춤을 추며 거리행진을 한다.
필리핀 사람에게 이탁은 장수와 번영을 가져다주는 신의 음식으로 여겨서 그런지 남녀가 전통의상을 입고 춤을 추며 거리행진을 하는 모습이 마치 이탁이라는 음식이 너무 감사하고 맛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듯했다. 특히 여자가 출산 후에도 기력 회복을 위해 이탁을 먹기도 하고 손님을 대접하거나 잔치를 할 때도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양계장에서 인위적으로 키워낸 닭이 아니라 노지에서 뛰놀며 자란 토종닭과 이탁을 푹 삶아 낸 국물 요리는 쫄깃한 이탁과 담백한 닭고기 육수가 혼연일체가 되어 우리나라 삼계탕처럼 더위에 지친 필리핀 사람들에게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보양식 역할을 한다.
새끼돼지 바비큐요리 ‘레촌’
필리핀에서 명절에 빠지지 않는 또 하나의 돼지고기 요리가 레촌(Lechon)이다. 생후 아직 젖도 떼지 않은 4~6개월 된 새끼돼지를 통째로 잡아서 숯불에 구운 바비큐 요리이다. 새끼돼지를 잡아 배를 가르고 내장을 빼내고 마늘과 고추, 파, 후추 등을 넣고 코코넛 오일을 발라가면서 구워낸 레촌은 잔치나 명절 음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필리핀 대표 음식이다.
이런 레촌 요리를 만드는 동안 새끼 돼지의 멱따는 소리를 종종 듣게 된다. 우리는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듣기 싫은 소리로 표현되지만 맛있는 레촌을 먹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다.
필사적으로 울부짖는 새끼 돼지가 최후의 발악과 같은 소리를 내는 건 안쓰럽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지만 완성된 레촌 요리 앞에선 새끼 돼지의 고통을 깡그리 잊는다고 한다. 겉이 바삭하고 노릇하게 구워진 레촌은 숯불에 소독한 바나나 잎을 깔고 살을 발라내어 가족과 친지들이 둘러 모여 손으로 정겹게 나눈다.
농경사회에서 풍요를 기원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준비한 레촌은 흩어져 있던 가족을 불러 모은다. 바삭한 고기 껍질을 들고 뛰어다니며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새끼돼지의 숭고한 희생이 제물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 같았다.
푸짐하게 차려놓은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기보다는 우리를 먼저 접대해 주고 남는 음식을 먹겠다며 기다리던 필리핀 사람의 접대 방식이 미안하기만 했다. 필리핀에서 지내는 내내 천장에 기어 다니던 도마뱀과 슈퍼사이즈의 대형 바퀴벌레에 놀라기도 했지만, 우리를 지극 정성으로 대접해 주던 필리핀 사람의 따뜻한 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제 우리도 추석 명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도 가족들을 접대하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손길의 수고에 감사를 보내며 가족끼리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세종대 관광대학원 겸임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