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셋이에요. 한 명은 16세, 다른 한 명은 15세, 나머지 한 명은 59세인 남편이죠.”
주요 미국 은행의 첫 여성 최고경영자(CEO)로 낙점된 제인 프레이저(53)가 2016년 한 여성 대상 강연에 나와 던진 농담이다. 프레이저는 지난 10일(현지시간) 시티그룹의 CEO로 지명됐다. 현 CEO인 마이크 코뱃은 이날 자신의 링크드인 페이지에 “그룹 지휘권을 넘길 최적의 시기를 항상 고민해왔고, 내년 2월에 은퇴를 결심했다”라며 “제인은 우리의 첫 여성 CEO로서 우리의 자랑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피플] 제인 프레이저 #"너무 잘하려고 하면 다 못해 # 다른 일을 해보는 것이 중요"
월스트리트는 물론 세계 금융권의 유리천장은 아직 견고하다. “프레이저는 선구자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프레이저의 전 직장 골드만삭스의 CEO 데이비드 솔로몬), “프레이저의 선임은 금융사(史)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월스트리트의 모든 여성에게 축제와 같은 날”(크리스티아나 라일리 도이체방크 CEO) 등의 축하가 쏟아졌다.
‘첫 여성’이란 수식어를 젖혀두면, 프레이저의 CEO 낙점 자체는 놀랍지 않다는 평이 많다. 그는 시티그룹이 CEO 후보들을 으레 앉히곤 하는 회장(President)직을 수행 중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그는 영국 최초의 여성 대학인 케임브리지대 거턴 칼리지를 졸업하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이후 골드만삭스에서 인수ㆍ합병(M&A) 담당 업무를 하다 컨설팅회사인 맥킨지로 옮겼고, 이후 출산을 하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다 풀타임으로 복귀하면서 시티그룹 행을 택했다.
두 아들을 두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으나 스스로를 ‘열혈 워킹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는 CNN과 2014년 인터뷰에서 “워킹맘으로서 항상 애들에게도 회사에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괴로웠지만 스스로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2016년 강연에서 골드만삭스에서 맥킨지로 옮긴 것도 “M&A 업무는 재미 있었고 동료들도 훌륭했지만 불확실한 스케줄이 힘들었다”며 “가정도 꾸리고 싶었기 때문에 생활이 좀 더 예측 가능한 컨설팅 업무로 옮겼다”고 말했다. 임원급인 파트너로 승진한 뒤 그는 아들 둘을 낳았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상사가 전화를 걸어왔는데 애가 갑자기 울기 시작해서 ‘전화 끊어요!’라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고 웃으며 회상하기도 했다.
인터뷰에선 웃었지만 당시엔 웃을 일이 아니었다. 육아와 업무의 균형을 찾는 건 힘겨웠다. 결국 결단을 내렸다. 남편이 일을 그만두기로 한 것. 미국 온라인 매체인 악시오스(Axios)에 따르면 쿠바계인 그의 남편이 풀타임 업무를 그만두고 부인을 보조해주기로 했다고 한다. 그의 남편도 금융업계 종사자로, 유럽계 은행인 드레즈너 클라인워트 벤슨의 글로벌 뱅킹 책임자였다. 부인을 위해 자신의 유망한 커리어를 접은 것이다. 프레이저가 런던과 뉴욕, 남미를 오가며 시티그룹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姓)을 유지한 프레이저는 “너무 다 잘하려고 하면 다 못한다”고 2016년 강연에서 강조했다.
은행원 프레이저는 어떨까. 그는 2014년 CNN에 출연해 “여성이 은행을 경영하면 금융업계가 좀 달라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여성이 은행을 경영하는 방식은 확실히 남자와는 다르죠. 그냥 성별에서 오는 차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양성의 문제죠. 아시아인과 미국인이 다른 것처럼요. 제가 있는 사금융업계에서 여성 임원진은 약 3분의 1 정도인데, 여성이 있으면 확실히 팀이 굴러가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남자의 방식이 틀렸다고 매도하는 게 아니라 남녀의 차이는 분명히 있고, 흥미로운 결과를 낳는다는 답변이다.
프레이저 자신은 사실 원래 소심한 편이라고 한다. 그는 2016년 강연에서 “나는 120% 준비가 돼 있다고 느끼지 않으면 나서지를 못한다”며 “한번은 회사에서 타이거 우즈와 시티그룹의 자선 골프 대회를 주선했는데 ‘어머 저는 자신 없어요’라고 말을 했다”고 전했다. 실제론 꽤 골프를 치는 편이었지만 우즈보다 못할 게 뻔했기에 주춤했다는 것. 통화 내용을 들은 그의 아들이 “엄마, 사람들은 타이거 우즈만 볼 게 뻔한 데 왜 안 하겠다고 해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력을 쌓으면서는 새로운 도전을 하는 용기를 냈다. 그는 강연에서 “해보지 않은 것을 하고, 지금까지 나와는 다른 일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도전을 하고, 그 도전을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들과 나보다 뛰어난 팀원들을 만난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독려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