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교도소’ 성범죄자 신상공개 논란
#격투기 선수 출신 유튜버 김도윤(30)씨는 지난 7월 말 자신의 유튜브와 소셜미디어(SNS)에 심상치 않은 댓글들을 확인했다. ‘유튜브에 아동학대 성폭력으로 신고했다’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뻔뻔하다’는 내용의 비난이 하루 사이에 도배됐기 때문이다. 김씨는 뒤늦게서야 ‘디지털교도소’ 홈페이지에 본인의 정보가 공개됐단 사실을 알게 됐다. 디지털교도소 게시판에 김씨가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가해자 중 한 명으로 잘못 지목된 것이다. 실제 김씨는 가해자 중 한 명과 이름만 같을 뿐 해당 성범죄 사건과 무관했다. 김씨는 디지털교도소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정정 및 사과를 요구했고 며칠 후 디지털교도소 운영자 측은 허위사실을 인정했다. 디지털교도소 SNS에도 “(김씨가) 받으신 모든 피해에 대한 모든 처벌을 받겠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김씨는 “실제 찾아와 사죄한다고 했지만 사죄는커녕 이후 현재 연락도 닿질 않고 있다”며 “디지털교도소 관련 논란을 지켜보면서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단 생각에 다음 주쯤 법적 대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n번방 사건’ 이후 개설된 사이트 #목숨 끊는 등 억울한 피해자 속출 #“명예훼손 소지, 공익 효과 없다” #수사기관, 엄격한 기준 통해 공개 #성범죄 솜방망이 처벌 개선 필요 #법 감정 맞는 양형 기준 마련해야
#서울, 춘천, 수원 등 전국 법원을 다니며 성범죄 재판을 기록하는 이들이 있다. 트위터 ‘D’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반성폭력활동가 마녀, 성신여대 자치언론 ‘온성신’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n번방 등 디지털 성범죄 재판을 직접 방청해 법정에서 피고와 원고가 주고받는 말부터 공판 때마다 제출된 각종 증거 등에 대해 메모하고 트위터에 공유한다. 때때로 함께 재판 방청을 할 사람도 모집한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으로 직접 재판을 감시하고 피의자를 잊지 않겠다는 시도다.
성범죄자에 대한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을 대신해 사적으로 응징하겠다는 취지로 성범죄자를 감시하고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움직임이 논란이다. 최근 문제가 되는 디지털교도소가 대표적 사례다. 디지털교도소는 n번방 등 “악성 범죄자에 대한 대한민국의 관대한 처벌의 한계를 느꼈다”며 “이들의 신상정보를 직접 공개해 사회적인 심판을 받게 하려 한다”고 밝히며 지난 6월 개설된 온라인 사이트다. 신분을 감춘 운영진들이 특정 성범죄 용의자 신상 정보를 제보받은 뒤 자체 내부 검증 과정을 거쳐 홈페이지 게시판에 공개한다. 법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서버를 해외에 두고 있다. 신상 정보가 공개된 대상자만 최대 100여 명에 이른다. 운영 직후 이 사이트는 신상공개 대상자로 다크웹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24)씨의 이름, 사진, 학교 등을 공개했다. 손씨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 사이트를 운영하고도 징역 1년 6개월형에 그쳤기 때문이다.
해외에 서버, 100여 명 신상 공개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공개된 사례 중에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바탕으로 신상정보가 노출된 피해 사례도 적지 않다. 채정호 가톨릭대 의대 교수도 성 착취 동영상을 구매했다는 이유로 지난 6월 디지털교도소에 신상이 공개됐다. 채 교수는 지난 8월 대구지방경찰청에 스스로 휴대폰을 제출해 포렌식 수사를 받았고 허위 사실로 드러났다. 앞서 7월엔 고려대 재학생 정모(21)씨가 ‘지인 능욕’으로 디지털교도소에 신상이 공개됐다. 지인 능욕은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성적인 이미지와 합성하는 디지털 성범죄다. 정씨는 억울하다는 내용의 글을 학교 커뮤니티에 올린 뒤 지난 3일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형사처벌은 사법기관의 영역인데 개인이 무분별하게 개입해 또 다른 피해를 유발하고 있다”며 “국가의 기본 법칙인 헌법이 왜 무죄 추정의 원칙을 보장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확정판결을 받기 전 피의자의 정보 공개는 형사소송법상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기본 정신과도 어긋난다. 수사 중 성범죄자 신상 공개를 해야 할 땐 법적으로 엄격한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8조의 2에 따라 피의자가 죄를 저질렀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어야 하고, 국민의 알 권리와 재범방지 및 범죄 예방 등 오직 공익에 부합해야 하며, 청소년 피의자를 제외한 경우 경찰은 신상공개심의위원회 심의를 통해 공개 여부를 결정한다. 피의자 인권 보호를 위해 공개 대상자가 행정소송을 통해 불복할 수 있는 규정도 있다. 법원 역시 2008년 시행된 성범죄자 신상정보 공개 제도에 의해 성폭력처벌법에 따라 유죄판결이나 약식명령을 받은 자를 대상으로 개인정보를 엄중히 공개하고 있다. 이와 관련 서혜진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과도한 낙인을 방지하기 위해 사법적 판단이 끝나기 전까진 피의자에 대한 정보 유출은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개인이 나서서 성범죄자를 응징하고 공개하는 행위는 명예훼손이나 모욕죄에 해당하는 등 위법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김대근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국가에 의해 공개되는 신상공개는 국민의 알 권리, 여죄를 파악할 수 있는 도움이 되지만 디지털교도소는 이런 공익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며 “판사 등 성범죄 관련자가 아닌 사람까지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행위는 명예훼손으로 처벌될 여지가 있다”고 했다. 서 변호사는 “디지털교도소는 교화나 치안 유지의 목적보단 단순히 국가 대신 개인이 형벌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위험한 움직임”이라고도 했다.
논란이 되자 디지털교도소 운영자 측은 8일부터 사이트를 일시 폐쇄 후 사흘 만인 11일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증거 없이 무차별 노출 부작용
성범죄에 대한 사적 단죄나 보복 등을 막기 위해선 이를 처벌하는 양형 기준 등 사법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대근 연구위원은 “디지털교도소는 사법기관에 대한 일각의 불신이 적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현상”이라며 “성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지 않는다면 개인이 복수하는 행위가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4월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청소년성보호법상 아동·청소년 음란물 제작 및 배포 범죄에 대해 2014~2018년 선고 형량을 분석한 결과, 평균 형량이 징역 2년 6개월(30.4개월)로 나타났다. 법정형 하한(5년)의 절반에 머무르는 수준이다. 양형위는 국민 법 감정과 달리 사법부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을 개선하기 위해 이달 중으로 디지털 성범죄를 세분화하고 새로운 양형기준 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